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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11. 로젠 에트르의 경우.

 투둑, , 투둑.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맞춰, 더러워진 흙탕물을 지켜보았다. 흙이 움푹 파여 고인 물웅덩이는 새까맣고 더러워서, 비참함에 일그러진 코레 바닐레아의 얼굴이 잘 보였다. 페르네 에트르의 모든 것을 이었지만 정작 페르네 에트르의 눈이나 웃음은 닮지 못한 얼굴이었다. 빗방울이 어깨를 두드리자, 코레 바닐레아는 발을 서로 톡 부딪치게 했다.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그런지,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버려진 구두를 줍지 못해 너무 오랜 시간 맨발로 걸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상처에는 더러운 흙이 묻어있었다. 찢어진 피부에선 꾸역꾸역 피가 새어 나왔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것을 닦거나 지혈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게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꿈을 꾸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페르네라니. 그런 건 원하지 않았다. 훤한 적이 없었다. 페르네가 바라는 건 아주 사소하고 확실한 행복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사랑받았으면 했고. 보편적인 평범으로 무장한 행복의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페르네 에트르에게 남은 건 뭐지? 비참한 죽음의 기억,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운 고함, 혈관을 찢는 듯한 고통의 추억과 피부를 헤집는 칼날 따위의 감각들. 에트르의 얼굴 위로 검은색 원이 천천히 피어난다. 페르네 에트르의 절망은 그런 식으로 드러난다. 꼭 소중한 기억에 페인트칠을 해가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완벽한 기억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울음을 참지 못했고, 페르네 에트르는 무너져 가는 절망의 기억들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사랑한 것들의 형체를 보존하고자 했다. 쓸데없는 발악이었다.

 

 그림자가 짙게 깔린 골목길. 코레 바닐레아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히어로인 것 같았다. 여기에는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건 코레 바닐레아를 찾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코레 바닐레아를 찾을 수 없었다. 페르네 에트르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들은 페르네 에트르를 찾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코레 바닐레아는 훌쩍임을 참지 못해 한참을 웅크려 있었다. 누군가 찾아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아, 예쁘다며 골라 입은 흰색 훤피스가 더러워지는 것을 방치했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누군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리란 생각도,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하리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멎은 줄로 착각한 코레 바닐레아가 고개를 들자, 그 위에는 한 남성이 코레 바닐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다지 큰 키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코레 바닐레아가 웅크려 앉아있는 탓인지, 고개를 많이 들어야만 했다.

 

 

 “, 맞고 계시길래.”

 “히어로들은 다 절 잡아 죽이려는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하하, 제가 다른 히어로들과는 좀 달라서.”

 

 

 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케케묵은 서류 속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을 압도하는 단 한 명의 경쾌한 목소리가 떠올라, 코레 바닐레아는 띄엄띄엄 입술을 붙였다 떼어냈다. 청색의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반 묶여 있었고, 검은색 눈은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코레 바닐레아는 자그마한 확신을 삼키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코레 바닐레아의 입 모양은 너무도 읽기 쉬운 것이었다. 로젠. 페르네의 입모양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반갑습니다, 코레 바닐레아. 로민 사일러스입니다.”

 꼭 선을 긋는 듯한 목소리였다.

 

 

 “뭔가 엄청난 짓을 하셨더라고요. 코레 바닐레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마다 기억하는 게 전부 다 다른 현상.’이 발생해버린 거죠. 대표님께서는 이걸 이능력의 영향.’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글쎄. 코레 바닐레아는 이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는데 말이에요.”

 

 

 페르네 에트르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고여 있었다. 로젠이라는 이름을 전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해 의아한 것과 알고 있기에 부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달랐다. 로젠, 아니. 로민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그리움이나 기쁨, 과거의 향수가 보이지 않았다. 페르네는 그게 억울할 정도로 서러웠다. 사랑하는 내 동생이었다. 죽어서도 함께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를 만난 것이 좋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바벨에 온 것이 기쁠지도 모르겠다고 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일말의 그리움도 없이. 페르네 에트르와 로젠 에트르라는 이름에서 선을 긋는 걸까. 전부 알면서. 전부 기억하면서!! 패르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로민이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표님이 뵙고 싶어 하세요. 코레 바닐레아, 당신이 벌인 소동은 당신의 이능력으로 인해 누구 하나 제대로 기억하질 않아 혼란만 남았거든요. 뭐 시간이 지나면 그런 꿈을 꿨었지~’ 따위의 망상, 혹은 해프닝으로 남을 것 같아 크게 문책하려는 것 같진 않으시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이능력.”

 “로젠.”

 “이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로젠 에트르.”

 

 

 페르네 에트르는 절박했다. 혼자만 남은 세상이었다.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누구 하나 페르네를 알아봐 주지 않았다. 잡아주지도 불러주지도 않았다. 열심히 기다렸고, 열심히 언질을 주어왔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페르네 에트르를 스쳐 지나갔고, 누군가는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더없이 멀쩡한데.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과거를 기억한다는 이유 하나로 미쳤다고 평가당하는 것은. 망상에 삶을 연명해 나가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었다. 그래서 페르네는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민 사일러스의 눈은 코레 바닐레아가 아닌, 그 너머의 페르네 에트르를 똑바로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젠은 다정한 아이였다. 누나가 좋다고 이야기해주었으니까. 선물이라며 팔찌며, 귀걸이며 뚝딱 만들어낼 정도로 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그것이 이능력이라 해도 말이다. 그는 그런 것을 쥐여 주면서, ‘다음에 같이 귀를 뚫으러 가자.’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아직도 귀를 뚫지 못했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길에서 돌아오는 로젠 에트르를 아주 오랫동안 상상했다. . 지금도. 누나를 찾아주었잖아. 우산을 씌워주었잖아. 나를 기억하잖아. 나를 알아보고 있잖아!!

 

 울음이 멎어갔다. 페르네 에트르는 땅을 짚으면서, 천천히 자세를 고쳤다. 어딘가의 맹목이 엿보일 정도로 갈라진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끝없이 푸른 바다를 바라고 있었고, 한없이 타오르는 순백의 애정을 원하고 있었다. 로민 사일러스는 그 마음을 엿보고, 천천히 눈을 접어 웃었다. 어딘가 짓궂기까지 해, 페르네는 로젠의 웃음이 저랬노라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그러자 로민 사일러스는 페르네에게 우산을 쥐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자상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우산을 건넸다.

 

 

 “이능력을 보유한 자는 정부에게 신고하고, 히어로가 되는 게 관례입니다, 코레 바닐레아 씨. 고로,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시길 바랍니다.”

 “……?”

 “가족 놀이는 즐거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건 곤란하죠.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동일하다 생각하시나요?”

 “로젠,”

 “제 이름은 로민 사일러스입니다. 모쪼록,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페르네 에트르가 간과한 것은. 누구나 과거에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새 삶을 살아간다. 코레 바닐레아가 페르네 에트르의 것을 안고 살아가듯, 누군가는 과거의 자신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코레 바닐레아처럼 구는 것은 아니었다. 페르네 에트르처럼 미련해지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에 불과했다. 되찾을 수 없는 애정과 행복이었다. 맹목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시간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걸어야 했다. 페르네 에트르처럼 역행하는 게 아니라, 나아가야 했던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로민 사일러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에 좋아했던 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한 호의는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옥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 ‘라는 말을 덧붙인 로민 사일러스가 천천히 구둣발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로민 사일러스는 웃으며 코레 바닐레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짓궂다고 생각한 웃음이었는데, 어딘가 흥미를 잃은 것 같기도, 악의적인 것 같기도 했다.

 

 페르네는 더 울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그를 찔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로젠의 영혼을 훔쳐 먹은 악마일 것이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내 동생을 돌려달라고, 네까짓 게 뭘 아냐며 그의 목을 조르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페르네 에트르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로젠 에트르였다. 그러나 로민 사일러스가 된 것뿐이었다. 그가 한 이야기 중에서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동일하게 여기는 쪽이 미련한 것이다. 어쩌면 미친 작자의 것일지도 모르겠지. 페르네 에트르는 그래서 웃었다. 웃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배신은 뼈아픈 것이었다. 날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했으면서.

 

 로민 사일러스의 발자국은 쏟아지는 폭우에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로민 사일러스는 에트르라는 이름이 적힌 동화를 깔끔하게 닫아버려, 페르네 에트르 역시 골목길에서 깔끔히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