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 상처는 흙과 먼지 따위로 더럽혀졌다. 딱지가 생기기도 전에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건만, 코레 바닐레아는 조금도 쓰지 않았다. 누군가가 -코레 바닐레아는 그 사람의 이름을 까먹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동생은 누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씌워준 우산은 이미 젖은 코레 바닐레아에게 소용이 없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구름 사이 뚫린 구멍으로 쏟아지는 붉은색 비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온몸이 젖어 들고, 코레 바닐레아는 심연에 빠져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코레 바닐레아의 기행을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했으면서. 그 모든 약속을 기억하는 건 코레 바닐레아 뿐이었다. 이건 일종의 배신이었다. 그래서 슬펐다. 울었다. 괴로웠다. 그렇게 흙탕물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문득 ‘사라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우산을 고쳐잡았다.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한걸음에 왈츠를, 두 걸음에 미뉴에트를. 코레 바닐레아는 미친 것처럼 폭소를 터트렸다.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코레 바닐레아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가 어깨를 치고 지나쳐도 그들은 허공만을 둘러보았고, 코레 바닐레아가 누군가에게 버럭 화를 내면 꼭 듣지 못한 것처럼 걸음을 재촉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 모습이 너무나 웃겨 춤을 췄다. 고상하게, 우아하게, 처참하고, 비참하게….
“코레 바닐레아.”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고, 만남 역시 존재한다. 코레 바닐레아는 웃음을 뚝 그쳤다. 이 황홀경의 순간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발에 난 상처가 벌어진다. 피가 새어 나왔다. 루나 포레스트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어느 말도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됐다.
로민 사일러스가 코레 바닐레아를 찾기 전. ‘일반’ 히어로들은 코레 바닐레아를 수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부로 돌아왔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코레 바닐레아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서.’ 레비아탄 데카라비아는 격분하며 그게 말이 되느냐 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이능력’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자 약식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에 참석한 것은 현장에 있던 히어로. 그것도 코레 바닐레아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소수의 인원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30년 전 이데아를 지켜낸 영웅이었고, 동시에 페르네 에트르라는 이름 여섯 글자를 빠짐없이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니샤 나탈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페르세포…, 페르네 씨의 이능력이 정확하게 뭐였죠?’
시선이 기울어진다. 히어로들이 루나 포레스트를 바라본다. 이 중에서 페르네 에트르와 싸워본 것은 놀랍게도 루나 포레스트뿐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스스로를 ‘별거 아닌 존재.’라고 칭하며 뒷선에 빠져있었으니 말이다. 루나 포레스트는 잠깐의 고민에 빠지더니, 그날을 회상했다. 사신이 나왔다. 페르네와 발맞춰 움직이지 않았다. 그 낫은 페르네를 베어도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다. 얼핏 보면 소환과도 같았지만, 이계의 존재를 인간이 소환해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환각이에요.’
그 뒤로부터 결론은 빠르게 났다. 페르네 에트르의 능력은 환각. 코레 바닐레아의 이능력도 그와 비슷한 결의 것이리라. 이능력은 그런 식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거야 그들은 코레 바닐레아의 이능으로 인해 한순간에 암흑으로 떨어졌는걸. 그리고 그들은 그 암흑 속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보았다고 했다. 무엇을 보았는 는 모를 일이었다.
나아가, 한 가지 가설을 덧붙이자면. 코레 바닐레아의 환각은 단순히 페르네 에트르처럼 존재를 갖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건 제 이름이 아니잖아요, 루나 포레스트.”
“코레 씨.”
“사라지고 싶었는데. 불리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 아니었는데….”
절망이 또렷하게 고여 있는 눈이었다. 그래서 루나 포레스트는 현재의 코레 바닐레아가 어떤 욕망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페르네 에트르를 기억하는 소수의 히어로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코레 바닐레아를 기억하지 못했다. 떠올릴 수 없었다. 현실에 개입하여 조작하는 것. 코레 바닐레아조차 알지 못한 이능력의 본질이었다.
가능한가? 그게 가능했나? 루나 포레스트는 현실과 허구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았다. 이능력의 여파인 것도 있지만, 그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개입하고 조작을 가능케 하려면, 상대를 스스로의 영역으로 끌고 와야 했다. 적어도 루나 포레스트는 그랬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의 것은 영역의 선을 알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정말로 그가 현실에 개입하고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면, 히어로로서의 자질은 엄청난 것일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낭패지.’
어떤 말이 기폭제가 될지 모른다. 이능력이란 이따금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니 말이다. 감정적으로 내몰린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정신조차 멀쩡해 보이지 않아, 루나 포레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신중해야했다. 30년 전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루나 포레스트가 코레 바닐레아를 바라보았다. 페르네 에트르는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 왜 눈앞의 그가 페르네 에트르처럼 보이는 걸까. 이럴 거면 그냥 퇴직할 걸,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렸잖아.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대표님께서 찾고 계신다는 이야기, 들으셨죠?”
“오빠가 없어졌어. 언니가 보이지 않아. 왜 나는 혼자인 걸까….”
“오, 하나도 안 듣는 걸….”
코레 바닐레아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래서 레비아탄이 이야기했다. ‘필요하다면 사살해도 상관없다.’ 최후의 방안이지만, 루나 포레스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지팡이의 겉을 튕겨, 칼날을 내보였다. 그라고 해서 과거의 잔해를, 그리고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의 환생을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눈을 보라. 절망적이었다.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본디 나락으로 빠져버린 인간은, 필연적으로 지옥을 이끌고 현세에 도달하기 마련이었다.
루나 포레스트는 히어로였다. 정의를 사랑하고 히어로들을 좋아한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내일이. 점점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악을 처단하고,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정의가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이 좋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히어로를 위한 히어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처단하는 게 가장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도 허락한 일이었다. 필연적으로 지옥을 불러올 저승의 망상가에게 자비를 꼭 내어줘야 할까?
코레 바닐레아는 실험체가 아니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일반인의 몸이었다. 페르네보다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루나 포레스트는 가볍게 말을 건넸다. ‘기분이 어떠세요?’ 페르네 에트르는 한참이 지나 대꾸한다. ‘죽여버리고 싶어….’ 한 명은 망상을 이어가기 위한 발악이었고, 한 명은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었는데. 두 사람이 서 있는 평행선은 오늘까지 똑같았다.
루나 포레스트는 기회를 잡는다. 천천히, 느리게. 고개를 든 페르네 에트르의 눈이 더 이상 루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아서였다. 칼을 고쳐 쥐고, 한 걸음을 내딛는다. 코레 바닐레아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그래서….
“엄마.”
루나 포레스트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다. 정의를 사랑하고 내일을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움에는 무너지고 만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세계를 얼마만큼 사랑해도, 결국 감정이라는 것은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었다.
“엄마….”
바닐레아 부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루나 포레스트는 검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페르네 에트르가 그들을 그리는 것만큼 루나 포레스트는 이따금 백색의 날개가 그리웠다. 그것이 밉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루나 포레스트는 결국 사랑이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사랑하는 그의 딸을 어떻게 베겠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기로 했는데, 라며 씁쓸하게 눈을 내리깐 그는 결국 지팡이의 겉면으로 코레 바닐레아를 기절시켰다. 긴장하고 경계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한 승리였다. 그러나 루나 포레스트는 코레 바닐레아의 발목을 꿰뚫지 않았다. 무의미한 짓이었다.
“여기는~. 히어로 루나 포레스트. 생포했습니다. 곧 데려갈게요.”
하늘의 구멍은 걷히지 못하고, 코레 바닐레아의 의식이 끊어지자 점점 세계는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의의 승리라고 칭해 마땅하나, 루나 포레스트는 이 허상과도 같은 싸움의 승리가 다분히 찝찝했다. 그냥, 그랬다.
'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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