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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14. 그레이엄 포셔니안의 경우.

 ‘그러니까, 얘가. 페르네 에트르… …란 말이지.’

 

 이능력 구속구를 착용한 코레 바닐레아는 꼭 시체를 닮은 모습이었다. 이디스는 그것이 어딘가 꺼림칙해, 코레 바닐레아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디스가 기억하는 페르네 에트르는 이것보다 더 나은 몰골이었다. 비록 언제나 피 냄새가 함께 했고, 우리들의 사이에는 탄환과 칼날이 난무했지만. 그럼에도 생기가 넘쳤고, 조금씩 사랑을 배워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코레 바닐레아를 봐라. 페르네 에트르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디스도 페르네 에트르를 생각하며 바라보니, 그와 멀지 않는 가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불쾌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절망과 슬픔은 코레 바닐레아와 타인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었다. 이디스는 불편하다는 듯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그럼에도 숨통이 트이지 않아,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건을 수습해야 하니 감시해라, 라니. 장난하나? 이디스는 불만을 속으로 삼켰다. 레비아탄의 결정이 못마땅한 것은 아니었다. 신입에게 맡기긴 불안하고, 그 사건에 대해 아는 자들에게 맡기려니 고참 히어로들이 없어지는 격이 된다. 뒤늦게 - 화보 촬영으로 인해 늦은 - 이디스는 레비아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수였다.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자였고, 여차할 때 코레 바닐레아를 제압할 수 있는 히어로였다.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이디스는 이 일을 맡을 수 없었다. 맡으면 안 됐다. 애써 극복했다고, 묻어뒀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하니까. 페르네 에트르,를 시작으로 너무 많은 생각이 몰아치니까. 그것은 그 어떤 해일보다도 강하니까.

 

 

 “이디스.”

 

 

 문득. 몰려오는 해일 앞에서 이디스는 고개를 들었다. 코레 바닐레아의 목소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작은 체구의 페르네 에트르는 넋이 나간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노려보는 것 같기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한 눈동자는 어디선가 많이 보는 것이었다. 이디스는 숨을 짧게 삼켰다. 이젠 바람이 불어도 그의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리지 않았다.

 

 

 “아샤 오빠는 왜 죽이셨어요.”

 

 

 높낮이가 없는 단조로운 말이었다. 이디스는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였다. 이래서 히어로 생활을 접고 도망친 것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레드 와인을 잔에 따라 부었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흐르는 피가 떠올라 와인병을 벽에 집어 던졌다. 벽지를 적신 얼룩은 지워지지 않아, 이디스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 기억과도 같다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것을 조금도 모르면서 페르네 에트르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온전한 원망 한 가닥으로 이디스를 대하고 있었다. 이디스의 괴로움은 페르네의 원망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페르네 에트르는 에트르의 모두가 소중했다. 그러니 작별 인사를 방해한 히어로에 대한 적대심이 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디스는 입을 열지 않았다. 페르네 에트르의 독무대였다.

 

 

 “오빠는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그만.”

 “다녀와서 안아주겠다고 했던가.”

 “그만하라고 했어.”

 “그런데 돌아오지 않았죠.”

 “경고했다, 네가 자유롭게 말할 상황이

 “당신이 죽여서.”

 “닥쳐!”

 

 

 가벼운 고함이었다. 그러나 절대 가볍지 않았다. 물로 만들어진 화살이 허공에 생겨난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이디스를 바라본다. 별거 아닌 말이었다. 페르네 에트르의 말은 어딘가 무게랄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가벼웠다. 정말 깃털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한 방울의 물방울처럼. 그래서 이디스는 듣고 싶지 않았다,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괴로웠다. 이유는 없었다. 수년, 아니,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란 존재했다. 상처는 언제나 아픈 것이었다. 마음은 언제나 연약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리를 쳤고, 그래서 위협을 했다. 그러더니 코레 바닐레아가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잘살아요.”

 

 

 사실 잘 사는지, 코레 바닐레아는 알 길이 없었다. 그의 뒷모습은 불안정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빠져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너른 푸른 물길에 몸을 맡기고, 둥실 떠올라 낙원의 행세를 한 지옥으로 처박힐 것 같았다. 그러나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이디스는 행동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인식까지 한 나절, 이해까지 영겁의 세월이 걸리고서야, 이디스가 흉흉하게 세운 모든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추락이었다. 철퍽, 하는 소리가 나고. 화살들이 코레 바닐레아의 발을 적셨다. 여전히 맨발인 채였다.

 

 

 “제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셨나요?”

 “,”

 “그레이엄 포셔니안. 생각보다 무른 사람이었네요.”

 

 

 코레 바닐레아가 흐리게 웃었다. 이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철퍽거리는 물방울이 허공에서 쏟아져, 이디스의 얼굴을 적셨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해 코레 바닐레아는 물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젖은 맨발을 제외하면, 본부에 오자마자 억지로 닦인 그 상태였다. 살짝 내려간 눈매를 느리게 감기니, 폭우가 시작되었다. 의도한 적 없고, 바라지도 않은 장마였다.

 

 그때보단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마주하는 것은 30년 전의 히어로들이었지, 빌런들이 아니었으니까. 죽어버린 내 동료도 아니었고, 죽여버린 그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이디스는 무뎌진 것이었다. 마음의 상처가 무뎌지고, 둥글어지면서, 어느 순간 아프지 않다.’라고 착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단단해졌다면 버텼겠지만. 무뎌진 것은 날카로운 말과 추억에 난도질당하고 만다. 코레 바닐레아의 흐린 웃음은 점점 삐뚤어진다. 웃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웃을 수가 없는 것처럼. 페르네 에트르가 덧붙인다.

 

 

 “당신을 배려할 이유는 나에게 없어요. 세상 모두는 당신에게 다정했나 보죠. 그거참 부럽네요. 우리는 세상의 다정을 한 조각도 받지 못해 죽어버렸는데.”

 

 

 이디스는 숨이 막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폐부를 찌르는 게 숨이 아닌 먹먹한 물기인 것 같았다. 물은 언제나 그의 편이었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위로를 할 거예요. 미울수록 꽃 한 송이를 건네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고 잔인한 현실로 심장을 도려내드렸답니다. 그러니 이제 아프지 않을 거예요. 평생 후회하고 미련하게 발버둥 치고 말겠죠. 그게 내 위로예요. 페르네 에트르가 할 수 있는 유일의 위로.”

 “네가 지금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

 “너무 잘 알죠. 나약한 인간에게 걸맞은 다정의 배려를 쏟아내고 있잖아요.”

 “이게, 위로라고.”

 

 

 그건 어딘가 궤변을 닮았다. 이디스는 입을 벙긋이면서 코레 바닐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물음이 완성되지 않았다. 나오는 건 숨결보다 미약한 것들이었다. 갑작스럽게 세상 모든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은 없는데,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힘들었다. 절망이 고스란히 전염된다. 병과 같은 감정이었다, 이런 건.

 

 

 “그러니 이번에는 눈감아 주시겠어요?”

 

 

 제가. 당신을. 위로하잖아요. 코레 바닐레아의 눈은 어딘가의 목표를 명확하게 잡은 것 같았다. 절망을 압도하는 무언가의 광기. 이디스는 그 눈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몰아치는 해일에 휩쓸려버린 안타까운 인간은 인어의 입맞춤이 내리 앉을 때까지, 심연 밑바닥으로 추락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 뭘 할 생각이야.”

 

 

 이디스는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디스의 손에서 벗어난 감정이 자꾸만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이 진부한 물음에 페르네는 대답을 꺼내지 않았고, 천천히 구속구를 풀어버렸다. 어떻게, , 거지. 해일 사이로 의문이 떠오른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론 풀 수 없는 것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치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떠나는지 읽을 수 없었다. 이디스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화살이 생기지 않았다. 이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이건.

 

 

 “이 은혜는 갚을게요.”

 

 

 코레 바닐레아는 쏟아지는 장마처럼 천천히 허물어졌다. 형체가 없었던 것처럼. 존재를 잃어버린 것처럼.

 

 

 “부디. 바라건대.”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페르네는 울고 있었나. 웃고 있었나. 얼굴이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망상가의 잔해를 끝없이 지켜보던 이디스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그레이엄 포셔니안은 생각한다.

 저 아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