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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10. 단탈리안 에트르의 경우.

 

 페르세포네가 기억하는 단탈리안은 바벨 최고의 실험체였다. 역사적인 성공체였고, 연구원들은 단탈리안을 퍽 편애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 편애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페르세포네는 알 길이 없었지만. ‘단탈리안이라고 지칭된 실험체에 대해 만족, 혹은 탐욕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몇 번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페르세포네는 바벨이 무너지기 전날 까지, 단탈리안이라는 이름을 듣고서 최강이겠네?’ 따위의 생각만 짧게 가지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그렇게 최강까지가 아니었다.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따금 그를 따른 우리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이었으며,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의 가족이었으니까.

 

 페르네 에트르는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마지막 순간에 그렇다면 다 함께 있자며, 손을 잡아준 것도 기억한다. 그는 무서워했을까. 그를 따라 이데아의 멸망을 소리치던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을까. 가장 높은 자리가 무서운 이유는, 그 자리의 책임감이 크기 때문이었다. 단탈리안도 인간이었다. 빌런이기 때문에 도덕성이 미묘할 수는 있다지만, 그렇다고 마음도, 감정도 없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책임감을 몇 번이고 생각했을 터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트르라는 이름을 고르는 데에 몇 발자국을 물렸을 리 없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페르네 에트르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이미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왔다. 빌런은 이따금 나타나고, 히어로들도 이따금 소란스럽게 바빠지지만. 재앙은 여전하고, 재난도 몰려올 때가 있지만. 그런데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문제 될 게 없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단탈리안을 다시 만나면, 이젠 멸망을 바라지 않는다고. 우리끼리 행복해지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멸망을 포기했다. 이데아의 안녕을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살아갈 이 세계를 버리고 싶진 않았다.

 

 분명 코레 바닐레아가 최초로 전생을 떠올려냈을 때는 심호흡을 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이능력을 눌러 감추면서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예전과 달리 평범히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함이 차고 넘치는 이 세계에서, 또다시 특별함으로 괴로워질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리하여 매일 밤, 단탈리안을 불러놓고 그의 손을 잡은 채 아주 많은 말을 이어나갔다. 대부분 괜찮다.’라는 말이었다.

 

 ‘보스. 저는 보스를 원망하지 않아요.’로 시작되는 말은 거의 고해에 가까웠다. 함께 있어서 즐거웠다, 행복했다. 나는 죽음이 무서웠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조금 괴롭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감당 못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그러니 당신을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우린 같은 에트르였잖아요. 이것은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당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몇 번이고 말해 몇 번이고 다듬어 고치면서, 위로가 필요 없어진 새 세계의 당신에게, 자그마한 사건이 되어주길 바란다.

 

 우리를 모은 건 당신이었으니, 당신이 우리를 기억해주면. 그리하여 우리를 한 번만 더 불러주면. 다시 모이지 않을까, 다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고쳤다. 한 문장을 다듬는 것에 하루를 온전히 쏟아부었다. 두 문장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날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나와 만나, 우리를 떠올린다면.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지면, 새 세계의 당신이라 해도 위로가 필요할 것이다. 다정이, 상냥이, 그리하여 온기가 필요할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때에는 다정한 동생이 되어야지. 제대로 단텔 오빠.’라며 웃어줘야지. 그런 마음을 품었다. 아주 오랫동안, 망상을 그려나간 페르네는 단탈리안 에트르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단탈리안을 기다렸다. 찾고자 노력했지만 찾아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데아의 법칙처럼, 그는 언제나 코레 바닐레아의 시선 바깥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기다리는 것.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바벨탑이 무너질 때, 멸망을 이야기하던 것처럼. 언젠가 이 세계에 다시 재앙이 불어 닥치면 당신이 선두에 서서 웃어줄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평범을 사랑하고, 다른 에트르들을 만나가며 코레 바닐레아는 아주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이토록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당신은 우리를 찾을 생각조차 갖지 않았구나.

 

 인생은 언제나 시궁창이다. 바란다고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선 수백의 누군가를 짓밟아야만 했다. 살기 힘든 세상이다. 레비아탄 데카라비아의 뒤를 따르는 갈색머리 남성을 눈에 담았다. 피곤한 나날이었다. 어떤 히어로가 수군거린다. ‘쟤가 그거인가? 대표님의 라고 불리는 사람.’ 그에 맞춰 누군가가 화답한다. ‘그런 것치곤 멀쩡하게 생겼는걸.’ 나는 저 남성이 누구인지 알았다.

 

 코레 바닐레아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뚝 떨어트렸다. 대체 왜, 이 꽃다발을, 지금 구매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코레 바닐레아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었다. 굽이 꽃잎을 짓이겼고, 꽃향기가 짙어졌다. 그러나 구두는 오랫동안 꽃향기를 품지 못했다. 길바닥에 내던져진 것은, 자연스럽게 벗겨져서였다. 코레 바닐레아는 히어로들의 틈을 파고들어, 인파 중앙으로 다가갔다. ‘라거나, ‘어째서라거나의 질문은 누구도 듣지 못했고, 허공에 그려낸 망상처럼 일그러진 시선이 똑바르게 올라갈 뿐이었다.

 

 구두가 사라져 고스란히 드러난 맨발은 딱딱한 돌길을 밟았고, 바람이 불면 스러질 것 같던 연약한 몸이 건장한 히어로들을 밀친다. 히스테릭한 사람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미친 사람이라 이야기될 정도로, 코레 바닐레아는 퍽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멀어진다. 코레 바닐레아는 조급함을 숨기지 않았다. 주저하지 않고 팔을 뻗었고, 그 뻗은 손은 오랜 시간에 걸려 누군가의 팔을 잡는다. 기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뀐 모습.

 

 

 “단탈리안.”

 

 

 코레 바닐레아가 중얼거렸다.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단 레비아탄 데카라비아였다. 그는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코레 바닐레아의 이름을 부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코레 바닐레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손을 뻗은 그가, 단탈리안의 뺨을 붙잡았다. 두 뺨을 감싸쥔 손은 페르네의 것보다 얇고 가늘었다. 희기까지 했다. 그러나 힘은 페르네의 것보다 조금 더 강했다. 고개를 돌리지도, 빼지도 못하게 힘을 준 코레 바닐레아는 단탈리안이 무언가의 말을 꺼내기 전에 입을 열었다.

 

 

 “.”

 “코레 바닐레아!! 미친 건가!”

 “!!”

 “당장 끌어내도록 해!”

 “왜 우리를 버렸어!!!!”

 

 

 히어로 대표가 각별히 아끼는 가 있다고 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 레비아탄 데카라비아가 누군가를 아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것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거니와, 그게 당신일 거라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니 그 개가 당신이면 안 되지. 당신이어선 안 됐지!! 코레 바닐레아의 손톱에 세워진다. 속에서 그려낸 수천가지의 망상이 돌바닥을 장악한다.

 

 

 “이데아에 멸망을 불러오자며!!!!”

 

 

 단탈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데아의 질서가 붕괴하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코레 바닐레아의 팔을 붙잡았지만, 그 누구도 떼어내지 않았다. 단탈리안의 뺨에 손톱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페르네 에트르는 자신의 본질부터 흐트러트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당신이, 당신만큼은, 당신은 그래선 안 됐어. 당신이! 어떻게!! 페르네 에트르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질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탈리안의 얼굴이 점점 희게 질렸고, 그것은 정말 보스라거나, ‘실험체’, ‘빌런의 얼굴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평범한 사람의 것이었다.

 

 누군가가 페르네 에트르를 거칠게 떼어내 밀쳤다.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탈리안은 레비아탄의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페르네 에트르는 돌길에 넘어져서 땅을 긁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말았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어. 당신이 어떻게 히어로의 밑에 있을 수 있어. 당신이 어떻게. 그를 향해. 사랑한다는 듯이. 나를 봐달라는 듯이 웃을 수 있어. 우리를 죽인 건 그들인데.

 

 우리는 그들 때문에 멸망했는데!!!

 

 페르네 에트르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히어로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코레 바닐레아, 미친 건가?” 페르네 에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탈한 눈으로,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단텔 오빠. 오빠가 없어. 오빠가 없어졌어. 보고 싶어, 지금 당장 우리에게 돌아와 줘.‘ 누구도 듣지 않은 울음소리였다.

 

 눈물이 터지고, 페르네 에트르가 여기에 있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한 순간, 모든 히어로들의 시야가 암전했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돌길에 넘어졌던 미치광이 바닐레아는 없어지고 말았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갈색머리 남자는, 막힌 숨을 토해내며 모조模造의 애정을 숨겼다. 그것은 현재의 그에게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