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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9. 노아 I. 이리스의 경우.

 팔랑, 팔랑. 서류가 넘어간다. 응접실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던 코레 바닐레아는 어딘가 오만한 태도이기까지 했다. 오늘은 후원자를 만나기로 한 날. 그러니까, 코레 바닐레아가 지원을 결심한 히어로 한 명을 맞이하기로 했다. 형식적인 절차고, 코레 바닐레아나 해당 히어로도 그다지 즐겁게 지내진 못하겠지만. 그런 것 치고, 코레 바닐레아는 제법 상기된 표정이었다. 설렜다. 기대됐다. 감히 그런 생각을 품으면서, 이리스 롤랑에 대한 서류를 팔랑팔랑 넘길 뿐이었다.

 

 서류상으로 이리스 롤랑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위로 형이 하나, 누나가 둘이 있는 집안의 막내아들이었고, 롤랑 집안은 가문이라고 불리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집안이었다. 맥시밀리안처럼 거창한 업적이 있거나, 역사적인 위인을 배출해낸 것도 아니었고. 세상에 간섭할 만큼의 힘도 없는, 그냥 평범한 집안. 평범하게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고 있고, 손을 잡으며 나들이를 떠나는, 생일날에는 모두 모여 케이크에 촛불을 꽂았고, 누군가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에는 다 같이 고심 끝에 꽃다발을 골라 건네는. 수수하고도 행복한 집안. 코레 바닐레아가 조사한 롤랑의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기대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서 울어버린 당신이 제대로 사랑받고 있음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우리와 하지 못한 것들을 잔뜩 즐기고 있는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찬란하려나. 그래도 조금의 공간은 내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처럼 죽을 정도로 서로를 아끼지 않더라도, 당신이 내세운 가족이란 울타리에 우리를 넣어주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나 울었으면서, 코레 바닐레아는 미련하게도 그런 희망을 품었다. 노아 오빠는 언제나 웃어줬으니까. 울보인 만큼 다정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나를 받아들여 줄 거야. 코레 바닐레아가 서류를 세 번 정도 읽었을 쯔음에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집사였다.

 

 

 “아가씨. 이리스 롤랑 씨가 오셨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차와 다과도 준비해주시고요.”

 

 

 문이 열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집사가 물러난다. 그 뒤로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이리스 롤랑이 보였다. 그는 상당히 앳된 얼굴이었다. 지금의 코레 바닐레아보다 어렸고, 기억 속의 노아 이리스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이제 겨우 스물이라고 했나. 여태껏 만난 에트르 중에서 가장 어리다며, 이번에는 노아 오빠가 막내라는 생각을 꾹 누른 코레 바닐레아가 앞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앉으세요, 라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이리스 롤랑은 그 뜻을 알아채고, 잠깐의 눈치를 보다 냉큼 자리에 앉았다. 쭈뼛거리길래 긴장한 건 아닐지 걱정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태연한 것 같았다. 페르네 에트르의 눈에는 그마저도 빳빳해 보였지만. 곧 집사가 다과와 차를 세팅해준 뒤 응접실을 나선다. 그리하여 이 드넓고 웅장한 공간에는 코레 바닐레아와 이리스 롤랑만이 남게 되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 아니에요! 바닐레아 씨가 차를 보내주셔서 편하게 왔는걸요.”

 “, 이리스 씨.”

 “?”

 “누나라고 부르셔도 좋아요.”

 

 

 코레 바닐레아는 사람 좋게, 그리고 답지 않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가 한 가지, 꾸준하게 실수하는 것은. 본인의 친밀감과 타인의 친밀감은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리스 롤랑은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후원자라니.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이리스는 회상한다. 평범하게 히어로가 된 줄 알았더니, 갑자기 후원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 후원자가 만나고 싶다고 하고. 왜 후원하는지도 모르는데, 찾아오니 누나라고 부르라 하질 않나. ? 따위의 반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리스 롤랑은 굳은 표정으로 하하하웃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보다…, 저를 왜 부르신 건지.”

 

 

 후원자가 있다고 해서, 그리고 지원을 받는다고 해서. 후원자를 만나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히어로였다. 고귀한 힘을 지닌, 세계의 구원자들. 30년 전의 그날로부터 히어로들의 위치는 공고해졌고, 코레 바닐레아처럼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는 이들은 몇 있었으나, 그렇다고 강압적으로, 강제적으로 그들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세계를 구한 이들에게 걸맞은 대우라면 대우일 것이다. 하지만 미숙한 사회초년생 이리스 롤랑은 왜 자신을 후원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했고, 일면식도 없는 코레 바닐레아의 초대를 받아 들였다. 사실 조금 걱정했는데, 응해주어 기쁘다는 생각을 조금 가졌다.

 

 이대로 유지되어도 나쁘지 않을 관계임에도 코레 바닐레아가 이리스 롤랑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앞에 놓인 찻잔을 살짝 들어 향을 맡았다. 왜 불렀느냐, 라니. 당연히 다시 가족이 되어주세요.’라고 정중히 요청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리스 롤랑이 그것을 받아들여 줄까. 이미 몇 번의 실패를 겪고 페르네 에트르는 조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과거의 잔해를 붙잡고 늘어지는 건 페르네, 나 혼자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스 롤랑에게 가족이니 뭐니의 이야기를 늘어놔 봐도. 그는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페르네는, 찻잔에 담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떫었다.

 

 

 “보고 싶어서요.”

 “?”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어떤 행동에 기뻐지는지. 좋아하는 건 무엇이고, 싫어하는 건 무엇인지. 취미와 취향은 어떤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궁금했어요. 보고 싶었고, 듣고 싶었어요.”

 

 

 노아의 얼굴은 늘 다정했다. 웃어주는 것은 한결같았다. 그가 히어로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에게 고문을 당할 때도 그는 웃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이리스의 이해할 수 없다.’라는 뜻을 내포한, 일그러진 표정이 낯설었다.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저런 표정도 짓게 됐구나. 짧은 감탄을 삼키고, 이리스 롤랑이 입을 열기 전에 냉큼 입을 열었다.

 

 

 “지금 행복하세요?”

 

 

 이리스 롤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는 안다. 행복한 사람의 눈과 행복을 아는 사람의 표정은 꼭 이리스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로 사랑받고 있었다. 그게 서러울 정도로 기뻤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말을 덧붙였다.

 

 

 “제대로 사랑받고 계시지요?”

 

 

 결국 이리스 롤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만한 질문은 아니었고, 코레 바닐레아는 제법 사실을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스 롤랑의 긍정에, 코레 바닐레아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제법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노아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잠깐의 대화가 오고가더니, 이후로부터는 이리스 롤랑의 독무대였다. 그는 페르네 에트르에게 자신이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행복한지, 사랑받고 있는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이야기해주었고, 페르네 에트르는 매 순간순간 코레 바닐레아의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울음을 참았다. 울어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행복하다는 게 기뻐서. 그 행복에 우리가 없다는 게 슬퍼서.

 

 페르네 에트르는 노아 이리스를 좋아했다. 정말로 잘 따랐고, 정말로 소중한 오빠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그 관계를 유지하며 언제까지나 그의 동생이고 싶었다. 하지만, 노아 이리스는.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지.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 그러니 행복한 그에게 두 번의 행복을 뺏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아무리 행복했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대도. 에트르라는 이름이 그의 모든 것을 뺏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페르네 에트르가 품은 희망과 별개로, 코레 바닐레아의 이성적인 판단 아래. 그에게 에트르라거나, ‘가족이라거나의 이름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페르네는 시큰해지는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이리스의 말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리스 롤랑은 그 목소리가,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나의 오빠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페르네 에트르는 노아 I. 에트르가 아주 그리웠다. 너무, 많이.

 

 응접실 문이 열리고, 처음에 만났던 집사가 이리스 롤랑을 데려가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스 롤랑 역시 정중히 인사를 하고,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습니다.’ 따위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뒤 뒤를 돌았다. 하지만 중간에 걸음이 막혀, 뒤를 돌아보니. 코레 바닐레아는 울고 있었다. 자신이 우는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한참이고 이리스 롤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어른스럽게, 그리고 성숙하게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리스 롤랑은 어딘가 아주 작고 어린아이가 억지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마음에도 남지 않고, 바람결에 날아갔기 때문에. 이리스 롤랑은 이 기묘한 만남에 대해 동료들과 이야기해야지, 라는 가벼운 생각만을 품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뿐인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