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헐! 대박! 나 딱 쉬는 시간이야!”
한적한 카페였다. 코레 바닐레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홍차를 홀짝이면서, 창문 바깥을 향해 눈을 돌렸다. 밖을 보고 있다 생각하기 쉬웠지만, 귀만큼은 활짝 열려 내부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카페의 사장으로 보이는 인물은 레나투스에게 손짓을 하며 ‘쉬고 오라.’ 라는 뜻을 내보였다. 레나투스 리베라는 후다닥 커피 한 잔을 내려, 자신을 ‘르네’라고 불러준 친구 앞자리로 향했다. 레나투스 리베라의 동선을 귀로 들어 그리며, 코레 바닐레아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놨다. ‘나’에게 오지 않는다는 건 제법 씁쓸한 일이구나. 홍차가 오늘따라 유독 떫었다.
언뜻 흘겨본 ‘레나투스 리베라’는 정말 사랑받고 자란 사람 같았다. 짙은 보라색 눈, 길게 기른 검정 머리카락. 애정이 뚝뚝 흐르는 애칭과 어딘가 발랄하고 유쾌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들. 레나투스 리베라는 친구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름이 오면 가족들과 여행을 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코레 바닐레아가 자리 잡은 지점에서부터 정확히 한 테이블만 떨어져 있었기에, 코레 바닐레아는 레나투스 리베라의 여행 계획을 제법 세밀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슬펐다.
레나투스 리베라의 가족은 ‘평범한 소시민’ 정도의 구성원이었다. 그의 위로 언니가 있다 했고, 오빠가 있다고 했다. 부모님의 이야기는 빠질 수도 없었다. 유쾌하게 조잘거리는 것을 가만 듣고 있으면, 전부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이제 미지근해진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평범하게 혈연으로 이어진 적이 없었고, ‘평범한 소시민’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개성이 뚜렷했지. 인원도 너무 많았고. 우리는 우리를 가족이라 정의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가족이라 정의하지 않아. 하지만 엔조, 너는 제대로 세상이 정의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을 살아가고 있구나. 마음이 복잡했다. 질투라기엔 다행이라는 생각이, 안심이라기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머금고 있던 홍차를 아주 느리게 삼켰다. 떫은맛이 아주 오랫동안 혓바닥 위에 머물렀다.
“참, 르네. 그러고 보면 어제 봤어?”
“응? 뭐가?”
“히어로 왔대! 그… 누구지, 아무튼. 왔다가 갔다는데. 너 어제도 여기 출근했으니까, 혹시 봤나 싶어서.”
레나투스 리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늘어트렸다. 아쉽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히어로은 어디에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히어로가 말이다. 지금의 너라면 그들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과 현생의 거리감을 느낄수록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엔조 에트르는 그들에게 이를 세우면서 주먹을 천천히 폈다. 그 위로 파직, 하고 피어오르는 전기의 형태를. 페르네 에트르는 아주 많이 봐왔다. 페르네 에트르가 기억하는 엔조 에트르는 영원처럼 다정한 나의 자매였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비참하게 코피를 닦을 때조차도 ‘다음’을 이야기하며 증오해 마지않는, 그리고 방해물이라 확신하는 히어로들을 무너트리기 위해 착실히 걸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의 엔조 에트르는 어떻지. 레나투스 리베라는 어떤 사람이지? 레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아, 완전 아쉽다! 나도 보고 싶은데~”
평범한 학생이 할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엔조 에트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반쯤 남은 홍차의 수면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눈동자가 똑바로 비춰져서, 어딘가 서글퍼지고 말았다. 엔조의 머리카락은 원래 검은색이었지만, 우리가 만날 때에는 휘황찬란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레나투스는 그렇게 염색하지 않겠지. 그냥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레나투스 리베라는 자신의 친구를 앞에 두고, 근무시간 사이에 있는 쉬는 시간 동안 열심히도 조잘거렸다. 듣기 좋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바벨도, 이데아도 아닌 어딘가에서 태어났다면. 저 맞은편에 앉아있는 건 내가 되었을까. 내가 될 수 있었을까. 평범하게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는 거야. 우리들은 길거리에 세워진 마네킹과 옷을 보며 소곤거리겠지. 너에게 어울리겠네, 아니겠네,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찍어뒀던 식당에 가는 거야. 네가 먹고 싶은 것도, 내가 먹고 싶은 것도 전부 시켜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눠 먹는 거지.
엔조 에트르가 들으면 ‘사소하네.’라며 호탕하게 웃어버릴지 모르겠지만, 페르네 에트르는 그런 상상을 아주 많이 했다. 또래 친구에 대한 갈망은 가족에 대한 갈망만큼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엔조 에트르는 페르네에게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나의 자매요, 친구요, 영원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이해하며, 같이 웃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그만큼 좋아한 사람이었기에….
낯선 검정색 머리카락을 곁눈질로 살피던 코레 바닐레아는 천천히 찻잔을 밀어냈다. 더 마시고 싶지 않아졌다. 이제 어떡하지, 무슨 말을 꺼내지, 어디로 가지의 고민을 하며 찻잔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때쯤에. 코레 바닐레아는 시선이 느껴지는 옆 테이블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대화를 멈춘 레나투스 레바라가 코레 바닐레아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귓속말인 것 같았지만, 전생의 기억까지 포함해 약 50년의 눈치를 가진 코레 바닐레아의 귀와 눈에는 평범한 대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 사람, 어디서 만난 것 같아.”
“그래? 근데 난 본 적 없어.”
“나만 본 건가?”
레나투스 리베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곧 코레 바닐레아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돌리는 것이, 어린 또래의 아이들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주책맞게도 귀엽네, 라는 감상을 상기하며 혓바닥에 남은 떫음과 마음에 남은 씁쓸함을 밀어냈다. 의자를 천천히 뒤로 밀어내 자리에서 일어난 코레 바닐레아는 티트레이가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고 카운터석에 올려두었다. 느리게 따라붙는 시선을 모르는 체하자, 그가 친구에게 속삭인 것 같았다. ‘어떡해. 들으셨나 봐. 기분 나쁘셨나?’ 그 모습은 페르네 에트르가 삐친 척 입술을 비죽였을 때, 페르네가 봐주자며 그를 꼭 안아주던 엔조의 것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페르네 에트르는 가게를 나서기 전에, 레나투스 리베라의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늘의 목표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안녕, 엔조. 내가 다시 돌아왔어. 우리, 오랜만이지. 그가 친구와 이야기하듯 나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가족이 되고, 현재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과거에 잠겨주길 바랐다. 혼자 걷는 것보단 친구와, 자매와, 그리고 가족과 걷는 게 더 좋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입 한 번을 열지도 못했다. 그는 지금이 더 행복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사랑받는구나. 사랑하는구나. 행복해 보이네. 에트르라는 이름이, 미련한 우리에 대한 연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역시 작별밖에 말하지 못한다는 건 야속해. 가혹한 일이야. 코레 바닐레아는 걸음을 느긋하게 기울였다. 또각거리는 구둣발소리가 들리고, 레나투스 리베라의 테이블 옆에 섰다. 레나투스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소, 손님.’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밝히고 바로 사과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경계심이 없는 그는, 너무 낯선 이였기 때문이었다.
“전 당신을 알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레나투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멍해졌다. 네? 하고 반문하는 듯한 눈동자에게, 코레 바닐레아는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언젠가 다시 시도하는 날이 올 것이다. 페르네 에트르는 그 어떤 빌런보다도 미련하고 한심한 작자였으니 말이다. 레나투스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기억해 내.’ 라고 다그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오후, 이렇게나 행복해보이는 엔조 에트르의 환생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웃는 것을 보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와서. 그래서 한 물러서기로 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허리를 살짝 굽히면서 눈을 내리 았다.
“행복해 보여서, 기쁘네요….”
그렇지만 난, 역시 네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함을 원망해. 뒷말을 삼키고, 허리를 천천히 편 코레 바닐레아는 카페를 유유자적 빠져나갔다. 또각 거리는 구두 소리는 일정했기 때문에, 레나투스 리베라는 아주 나중에야 입을 열었다. “너는…?” 그러나 그건 레나투스 리베라도, 그의 친구도 눈치채지 못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내뱉느니만 못한 말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레나투스 리베라는, 정체 모를 손님이 떠난 문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쉬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단탈리안 에트르의 경우. (0) | 2021.05.05 |
---|---|
9. 노아 I. 이리스의 경우. (0) | 2021.05.05 |
7. 아샤 에트르의 경우. (0) | 2021.05.03 |
6. 베로나의 경우. (0) | 2021.05.02 |
5. 데릭의 경우. (0) | 2021.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