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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들

야경

 

 

 

(중략)

 

 

“트리거. 맥주는 좀 마셔?”

“어디서 난 거임?”

“마시냐고.”

“잉.”

 

이미 깐 500ml 맥주 캔. 글라우코피스는 그것을 트리거에게 내밀었다. 거품이 입 주둥이에 애매하게 맺혀있고, 이슬이 맺힌 표면은 축축해 보였다. 트리거는 맥주캔을 받으면서도 이걸 마셔도 되는지, 아니면 그냥 들고만 있어야 하는 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글라우코피스는 한 캔을 낑낑거리며 더 까더니, 탄산음료를 마시듯 한 모금 크게 홀짝였다.

 

“마시라고 준 거야.”

“엄…. 내가 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데? 진심임?”

“구라겠냐.”

“나 혼내려고 부른 거 잖음.”

 

아, 이 말은 덧붙이지 말 걸 그랬나. 트리거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맥주 캔 표면에 맺힌 물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미끌미끌해져서. 손톱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여름 밤, 습하기 그지없는 공기에 축 젖어있던 글라우코피스는 그런 트리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깔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평소의 글라우코피스가 아예 안 웃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 이후로 소리 내어 웃는 건 글라우코피스 답지 않다. 그런 생각에, 트리거는 맥주 캔의 주둥이에 빨대를 꽂았다. 헬맷을 벗으면 될 일을 굳이 돌아가느냐 타박이 이어질 법도 하건만, 오늘따라 글라우코피스는 답지도 않았고, 조용하기도 조용했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우리는 야경을 지켜봤다. 번쩍거리는 도시의 불빛은 뒤숭숭한 마음과 맞물려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한 때, 우리도 저런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도 했었지. 화려한 불빛들 사이를 누비며, 쏟아지는 플래시 앞에 서며. 옳음을 추구하고, 옳음을 해내기도 했어. 지금이라고 아닌 건 아니지만, 그 때는 조금 더 정당했고.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었지. 잠깐 상념이 길어진다. 여름밤의 바람은 시원하긴 커녕 찝찝하기만 했다. 침묵에 침묵의 무게가 더해질 때. 글라우코피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거, 네르샤가 독단으로 벌인 일이지?”

“….”

“너는 뒤늦게 확인했고.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고.”

“아니, 그.”

“네르샤가 독단으로 저질렀다고 하면 내가 지랄지랄 할게 눈에 훤하니까. 나라도 완충재 역할을 해야겠다. 네르샤랑 글라우코피스랑 또 싸우면 한 명 가출하는 걸로 끝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게.”

“그리고 이런 일로 내게 혼나는 거, 처음은 아니니까. 버틸 수 있겠지, 라는 마음에.”

“……….”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탈옥 이후, 일련의 사건 중에서 글라우코피스와 네르샤가 부딪히지 않은 날은 없었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인 것처럼 서로를 대했으며, 실제로도 그닥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네르샤 쪽에서 상대를 설설 긁는다지만, 글라우코피스는 네르샤의 도발을 조금도 봐주질 않았다. 두 사람의 태도는 한결같았기 때문에 트리거와 유한월, 그리고 크레바스는 암묵적인 합의로 두 사람을 붙여두지 않기로 했다. 붙어야 한다면, 한 사람이 껴 있는 것으로. 

 

지금의 경우가 그 암묵적인 합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 억울하긴 하겠지만. 조금 많이 혼나긴 하겠지만! 네르샤와 단 둘이서 싸우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한월과 크레바스에게 작전 회의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나중에 분위기가 좋았을때 사실~ 이라며 운을 떼면,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말을 내뱉은 것도 없잖아 있다. 글라우코피스의 성격이야, 뭐. 한창 혼나던 때에 비하면 덜하겠지. 혹은 그와 엇비슷해도 버틸 수 있겠지…, 라는 생각 역시 하긴 했다.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누가 대상이어도 말이다. 트리거는 괜히 손목 안쪽을 긁었다. 모기에 물린 것도 아닌데, 괜히 피부가 부풀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글라우코피스가 천재라는 사실은 우리 중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우리도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르샤의 말 역시 틀린 바 없다. 글라우코피스는 천재일 뿐이지, 신은 아니었다. 우리들이 입을 다물고, 그의 부엉이가 닿지 않았다면. 글라우코피스가 전부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고로, 트리거가 글라우코피스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이 침묵이 아니라. 적당한 변명. 그것도 설득력 있는 문장을 내뱉어야 했다. 트리거가 변명을 쥐어 짜는 사이, 한 가지 오류를 깨닫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당황이었다. 글라우코피스는 트리거의 반응에서 확신을 얻었으리라. 유한월이 그러했듯, 똑똑한 사람은 유추하는 법도 뛰어났으니 말이다…. 

 

“네르샤만을 위해 그런 건 아니었음.”
“나도 나름 위해줬다?”
“이번 기회에 싸우게 되면 끝장 볼 거 아님? 저번에는 비교적 가벼운 언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는 가득했잖냐. 크레바스도 증언해줄 거임. 근데 이번 사건이 좀 컸음? 후폭풍 장난 아닌데, 네가 이런 걸 용납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서….

“그래서 나를 속였다.”

 

말 자체를 들어보면, 글라우코피스는 꼭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다. 유한월도, 크레바스도 동의한 일이었구나. 중얼거림 한 문장이 끝나자, 그는 맥주를 홀짝이고 말았다. 꿉꿉하고 찝찝한 바람이 글라우코피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트리거는 이 대목에서 글라우의 마음을 신경쓰지 않음에 죄책감을 가질 뻔 했으나, 의외로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글라우코피스는 상처 받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늘어놓은 게 아니었다.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으나, 상대가 상처받았지 않았음은 의외의 면죄부기도 했다. 글라우코피스는 3분의 1도 마시지 못한 맥주 캔을 난간 위에 올려뒀다. 턱을 괴면,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한다.

 

“너를 미끼로 바쳐서.”

“맛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좀…. 하찮지 않음?”
“옛날에는 반박도 못했으면서. 이럴 때만 말을 잘 하지.”

“장점으로 여겨주면 아리가또네.”

글라우코피스는 작게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황당해서. 그러나 웃음소리는 생각보다 맑았다. 이에 트리거는 '그나마 잘 풀릴 수 있을지도.' 정도의 생각을 가졌다. 글라우코피스도 현실에 제법 많이 수긍했다. 그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절에 짊어진 책임은 많이 덜어둔 상태다. 사람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유해지는 것에는 이러한 무게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트리거는 빨대 끝을 헬맷 밑으로 밀어넣어 한 모금 홀짝였다. 그리고 글라우코피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웃음끼 가득 섞인, 가벼운 목소리.

 

“사람을 멍청하게 여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

 

 

“아, 한월~ 아까는 고마웠어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

“왜 그랬어?”

 

글라우코피스가 아지트에서 얼마나의 지랄을 했는 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을 감당하는 건 늘 유한월과 크레바스의 몫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바락바락 대들고 싸우면서도, 크레바스 앞에서는 조금의 고집을 꺾어준다. 그 이점을 이용하며, 글라우코피스가 평소의 성격으로 돌아오게끔 말을 유도하는 건 유한월의 몫이었다.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고, 행동이며,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순간이면 어린 애들의 뒷수습을 맡아 하는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글라우코피스의 예민함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이제야 아지트에 돌아온 네르샤에게 인사보다 질문을 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랬어? 글라우코피스가 겨우 진정하고 옥상에 올라간 것이 30분 전이다. 트리거가 글라우코피스의 말을 듣고 올라간 건 5분 전이었고. 그 사이 크레바스와 많은 이야기를, 그리고 가설을 나눠보았지만. 이 긴 시간 동안 네르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게 또 답답했다. 예상 내의 행동만 하면 이해 못해도 받아는 들이겠는데. 예상을 늘 벗어나니,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부터가…. 유한월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짚었다. 왜 그랬어? 말이 반복된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그럼 뭐가 바뀌어요?”

 

덜컹. 신발을 벗은 네르샤는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차가운 보리차가 담긴 물병. 컵을 쓰라 누누이 이야기했으나 입을 대지 않았다는 이유로 물병 채로 마시는 건 이 아지트에서 암암리에 퍼져나가는 못된 습관이다. 물 몇 모금을 홀짝이던 네르샤는 입가를 닦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그럼 뭐가 바뀌냐구요. 여전히, 반복되는 말이 가볍다. 크레바스는 벽에 기대 네르샤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 무거운 공기를 또 감당해야 하다니. 탈옥범으로 살아남기도 버겁지만, 이 멤버 중 어른으로 살아남기도 버거운 법이다. 

 

“바뀌고 안 바뀌고는 중요하지 않고. 이해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딱히 필요 없는데도요.”
“이거 상냥한 부탁 같은 거 아니야, 네르샤.”
“오호, 그럼 협박이라는 건가요?”

글렀다. 대화할 마음이 전혀 없잖아? 차라리 글라우코피스처럼 불같이 화를 내면 달랠 여지가 있다. 괜찮다, 진정해라. 살살 구슬리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예 일방적으로 문을 닫아버리면, 바깥에서 두드리는 것 외의 답은 없다. 하지만 상대는 네르샤고, 두드린다고 열릴 문도 아니고…. 유한월의 머리는 오늘도 지끈거린다. 이 노답의 상황을 한참이나 듣고 있던 크레바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제자리 걸음이군. 

 

인생에는 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능력자라는 이유로 늘 사건과 사고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뿐이랴. 우리가 허비한 5년의 세월은? 그 사이에 피어난 자괴감과 우울은? 우리들이 삐걱거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대화의 부족만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의. 상황이. 너무나 최악이기 때문에….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것마저 불가능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크레바스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 한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잠깐 쉬었다가 이야기하라는 뜻이었고, 유한월도 내심 그것을 바라기도 하였다. 한숨처럼 담배를 피고 오겠다며 집 바깥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레바스는 여전히 웃고 있는 낯의 네르샤를 돌아봤다.

 

“그런 식으로….”
“레스 후배도~ 한 마디 하게요?”
“그런 식으로 하다간.”
“아, 나중에 이야기해주면 차암 좋을 텐데.”
“나중에 구하고 싶었음을 인정받지 못하게 돼.”

뚝. 네르샤의 웃음이 끊겼다. 크레바스는 굳어버린 웃는 낯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네르샤는 그 곳에서 잠시,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서 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딱히 방이 없다거나, 다리가 아팠다거나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서 있기가 싫었다. 하하, 웃음 소리가 건조하게 새어나왔는데… 도저히 웃음같지가 않아서. 네르샤는 턱을 괴고 숨을 참았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너희들이 아는 게 뭔데 내게 그런 말을….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네르샤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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