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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들

# 08.

 

#. 

"난 수감되기 전까지, 이능력과 이능력자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했어."

 

 

#. 

늦여름의 비가 멎어갈 때 쯤. 나는 물자국이 남게 된 벽에 몸을 기대면서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일회용 종이컵 안에는 오렌지 주스가 들어차 있었고, 입부분은 물어뜯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렴풋, 어두운 시선으로 그 자국을 확인하면서 시선을 느긋하게 굴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라는 것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고, 이래서 두려운 것이다. 이 주제를 왜 꺼내게 됐지. 수감되기 전에는 종이접기를 꽤 잘했다는 네르샤의 말로 하여금 이 대화가 시작되었다. 다들 가벼운 분위기로 시작했기 때문에, 누구나 가벼운 것들을 툭툭 내뱉었다. 백수 생활을 즐겼다거나, 하루 종일 잠만 잤다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가족들과 먹었다거나….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온종일을 현장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서류에 묻혀 살았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의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글을 적기 바빴다. 어떠한 공통점을 무리하게 찾아내고, 어떠한 차이점을 억지 부려 벌려놓길 반복해온 나날. 나는 그 사이에서 소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알잖아, 나 일 중독인 거. 그들은 더 이상 내게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이후, 이런 상황이지만 소소한 취미를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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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우리들의 취미는 젠가로 결정되었다. 대체 왜? 라는 반박도 존재했지만, 이 지하에서 안전하게 모두와 할 수 있는 취미는 몇 없으니까 말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뜨개질이나 해! 라며 구박도 조금 들었지만, 트리거는 벌떡 일어나 내가 개꿀잼인 젠가를 알고 있다며, 나중에 집에 있는 걸 가져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집에는 어떻게 갈 건데?? 글라우코피스가 태클을 걸었지만, 모두들 한마음 한 뜻으로 무시했다.) 젠가는 하루에 한 번, 혹은 삼일에 한 번 씩 진행되며 패자가 다음 젠가까지의 설거지를 전부 하는 벌칙을 걸기로 했을 때쯤 글라우코피스는 잠깐 자리를 떴다. 배가 터져 죽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욱, 나 토할 것 같아. 자러 갈래. 휘청거리며 일어난 글라우코피스는 꼭 취한 아버지가 크레파스를 사 올 것 같은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갔다. 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라는 걱정도 작게 들렸지만,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주스를 배 터지게 마셨을 뿐이니 토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다, 로 결론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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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코피스는 일 중독이긴 하지. 근데 쟤는 좀 과해. 난 사실 탈옥하고 나서 쟤가 쉬는 걸 본 적이 없거든. 노는 재미를 알고 있기나 할까 몰라." 유한월이 주스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방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의 일이었다.  그의 말에 이어지는 대답은 없었다. 알게 모르게, 히어로 활동을 공유한 세 사람은 그 일 중독 성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네르샤는 아까까지만 해도 종알종알 열심히 떠들던 입술을 맞붙였다. 모처럼 시작된 주스 파티 -과자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간식은 없었다.-는 그렇게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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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네르샤. 네 능력이 이런 형태인 건 분명 어떠한 이유나, 뜻이 있을 거야. 그 원인을 알면 네가 활동하는 게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라우 선배, 그걸 어떻게 알아요? 흠, 응용력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아니야. 응용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래, 근원. 근원을 이해하자고 하는 거야. 세상 모든 학문은 그런 식으로 발전했어.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그리고, 학문의 범위가 넓어질 때마다 우리들은 무언가의 결과를 내놓았지. 내가 말하는 건 그러한 이해야. 네 이능력을 통해서 너 자체를 이해하자는 뜻이었어. 그럼 무엇이 되었건, 네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야. 이건 아직 가설이라 더 말해주지 못하지만… 있잖아, 네르샤. 사실 우리의 이능력은 생각보다 우리의 인생에 더 밀접하게 엮여있을지도 몰라. 자! 이제 휴식시간 끝이야! 다시 처음부터!"

 

 

#.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않으셨네요. 네르샤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우그러트렸다. 컵에 조금 남은 주스의 잔여물들이 손가락에 튀고 말았다. 그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며, 네르샤는 고개를 뒤로 넘겼다. 나는 그의 가설이 단순한 가설로 남아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가설이 정설로 굳어지는 순간, 이 빌어먹을 이 능력의 형태가 곧 내 치부로 굳어질 테니까. 네르샤는 아무 말 없이, 물로 얼룩진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죽음 너머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틈을 벌려 여는 것은, 새로운 것을 재창조해내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대체 어떤 두려움, 어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까. 네르샤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쓰레기통으로 컵을 던져 버렸다. "그래서 라우 선배가 재미없는 사람이겠죠." 다른 이들은 그의 말에 선선한 긍정을 표했다. 

 

 

#.

"어이 젠가 하자."

"………내일 부터 하는 거 아니었어?"

"네르샤가 마네킹으로 가져왔음."

"내일 하자, 나 배불러 죽을 것 같다니까."

"유한월이 빠지면 일주일 내내 설거지시킨대"

"응 나 잠 다 깼어 너네 죽었다 이제"

 

 

#.

"이능력 써도 되나요~?"

"네르샤 너는… 이능력 쓰는 게 손해 보는 거 같은데."

"아뇨, 아뇨. 젠가는 제가 뺄 건데요. 이능력으로 상대방을 방해하고 싶어서."

"저런 사람이 히어로라니. 좋은 생각이다."

"유한월 너 이 자식." 

 

 

#.

이런 시시한 놀이를 한 게 언제 적이지?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젠가를 쌓는 이들을 바라본다. 글라우, 뭐해? 같이 쌓아야지. 손목이 잡히고, 이끌려 바닥에 앉을 때쯤에는. 다섯 명의 머리가 옹기종기 젠가의 위에 모여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 풍경을 보고 신기하다면 신기하다는 감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럴 자격이나 있는 사람들인가. 

 

 

#.

홀로 살아남은 사람이 총 다섯 명. 

세상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또 다섯 명. 

함께해봤자 좋을 것 없는 이들이 모여, 어떠한 행복이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이런 의미 없고 부질없는 일을 벌이는 것인지. 나는 우리들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그 이상의 시시한 정이라도 꿈꾸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래서 너희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지. 방문에 응했을 때, 함께 문을 열었을 때, 설산이 녹았을 때, 교도소의 문이 잠겼을 때. 나는 그들의 웃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허락하고 싶지 않지만, 이 정도의 웃음은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블록을 하나 쌓아 올리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한테 젠가로 싸움을 걸다니, 뒤졌다, 다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1회 젠가 배틀은 내가 졌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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