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리들은 우중충함에 힘껏 가라앉으며 실없는 소리를 반복했다. 기운 빠지는 소리에 우울해질 때면 소리 내어 웃었고, 웃음에 배가 아파올 때쯤이면 눅눅함에 젖어갔다. 시시한 하루였고, 한심한 하루였다.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누군가 푸념처럼 입을 꺼내자, 한숨보다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온기 잃은 종이컵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눅눅한 생활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이런 우리들조차 필요한 것이 세상인지라.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허리 숙여 좁은 철문을 비집을 일도, 퀴퀴한 곰팡내를 외면할 일도, 남들의 발목과 시야가 마주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겠지. 진흙탕처럼 팔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언젠가의 우리는 그런 긍정론을 입에 담기도 했다. 누명을 벗으면. 진실이 알려지면. 세상이 우리를 봐주면 따위로 시작된 수많은 '만약'은 나를 웃게 만들기도, 즐겁게 만들기도, 나아갈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장대비 속. 상자 안에 버려진 개의 행방을 아는 이 없고, 바닥에 물이 차오름을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우리들의 긍정론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우리들은 어떤 공허를 표류하는가. 우리들의 아지트는 다섯 명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인데. 어쩐지 누구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존재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차가워진 보리차를 홀짝인다. 이 적막함을 깬 유일한 소음이었다. 누구 하나 창 밖을 보지 않았고,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다들 힘낼만큼 힘을 냈다. 노력할 만큼 노력했단 말이다. 우리는 텅 빈 손을 간지럽힌 모래 몇 알로 여기까지 왔다. 버텨냈고, 이겨냈다. 희극과도 같이, 치열하게 살아 맞이한 오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망가진 세탁기를 고치지 못했고 축축하게 젖은 벽지의 얼룩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이런 게 인생이란다.
이 기나긴 정적과 무기력 속, 벽에 기대고 있던 크레바스가 몸을 떼어냈다. 어딜 가느냐 물었더니, 일할 시간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멈춘 시계의 건전지를 바꾸지 못했으니, 이 아지트에서 시간을 아는 사람은 이제 크레바스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는 길에 건전지 사올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굴하지 않고 겉옷을 챙기는 그를 말릴 법도 한데, 누구 하나 그를 말리는 시늉도 않는다.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거리를 훑어보고, 잡지 못한 흔적을 발굴해내는 건 중요하니까. 꼭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젠 우리들의 의무와 같은 일이 되었으니까…. 나는 자기 합리화처럼 말을 마음으로 늘어놓았다. 그러나 역시 종이컵은 따듯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눅눅해진 장작을 말려야 불씨가 붙을 텐데. 우리는 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보고자 한다. 할 수 없는 것을, 자꾸만 해내려고 한다. 그게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 지 모르는 이 없는데도 그러했다. 그만큼 우리의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비가 오니 선글라스는 못 쓰겠구만. 습기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라며 투정을 늘어트린 유한월이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자꾸만 눈앞을 어른거리는 그 절망을 외면하고 싶다는 듯. 굳이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 부질없는 발버둥 속에서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다녀오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제가 쓸까요? 그 선글라스요~ 아, 그건 좀. 너 분명 잃어버릴 거잖냐…. 어머, 신뢰도가 너무 없지 않아요? 우리 제법 열심히 합을 맞췄는데. 얕은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꼭 새벽 4시에 진행되는 라디오 대본 같았다. 어딘가 막힌 듯했고, 노이즈가 섞였으니. 정말 세상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 중인 사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즐거운 웃음이라 지칭할 수가 없었다. 모든 대화를 거대한 촌극으로 여길 정도니, 즐거움이나 기쁨 따위의 긍정적인 마음을 누가 품겠는가. 선글라스는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내던져지고 네르샤는 츄리닝을 챙겨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비가 오는 날은 날씨가 추우니까요. 능청스러운 말이었다. 초여름의 장대비에 추위를 느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셔츠에 츄리닝은 어울리지 않다니까.
나는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건 트리거였는데, 어차피 챙길 게 많지 않다는 이유로 가장 빨리 신발장에 도착했다. 신발을 끄는 소리, 그리고 허리 굽혀 신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어디에 가? 나이에 맞지 않는, 과장된 앓는 소리와 함께 트리거가 입을 열었다. 헬멧으로 인해 먹먹해진 목소리가 나는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해 '너무 의존적인 게 아니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으나. 나는 태어나길 강박과 집착의 성질을 띄고 있던 지라. 내가 정하지 않은 곳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에 관례가 된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발행동이라면서 혼날 바에야 미리 묻고 움직이면 되잖아, 따위의 결론으로 생긴 질문 말이다. 나는 종이컵의 주둥이를 손톱으로 톡, 톡 뜯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명의 시선이 내게로 달라붙었다.
저기, 있잖아. 풀벌레 날갯짓보다 못한 소음이었다. 개미굴의 입구보다 작은 목소리는 손톱이 맞부딪히는 소리에 묻힐 듯 먹먹해진다. 오늘은 그냥 쉴까? 나는 자라나며 무기력과 포기를 익혀온 사람인지라. 연속된 우울에서 동기나 의지를 잃어온 지 오래였다. 머리로는 이게 정답임을 알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면서도 '이게 정말 맞는 걸까.'라는 소나기에 젖어오고 있었단 말이다. 그러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요령 나쁜 게으름에 목소리가 떨린다. 성실할 것을 요구한 건 나였는데 말이다.
손톱은 수 차례 맞부딪혔으나 부러지지 않았고, 창 밖의 장대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차피 뜨나, 감나 똑같은 시야를 몇 번이고 굴렸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네 명의 시선이 떨어지는 게 느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소리, 철문이 불안정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톡톡, 뭉툭한 몽둥이가 나를 두드린다. 어이, 글라우. 이거 챙겨. 내 손에서 조금 구겨진 종이컵을 빼앗아간다. 그것의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쥐어준 것은 장우산이었다. 트리거는 이내 내 머리를 툭 치더니, 다녀오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오늘도 간바레! 젖은 얼룩의 벽지 때문인지, 대단히 멋진 주인공의 뒷모습은 아니었다.
인사가 하나하나 쌓일 때마다, 신발은 하나 하나 줄어갔다. 종래에는 내 신발밖에 남지 않아, 좁아터졌던 신발장은 조금 휑해졌다. 나는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결국 장우산을 챙겨 잠기지 않은 철문의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물론 밖으로 나간다 하여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최약체라는 사실은 발각되었을 때 도주할 힘조차 없다는 것이라서. 이대로 나갔다 무슨 사건에 휘말리면 죽거나 체포되거나의 극단적 가정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벌써 뿔뿔이 흩어진 이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비가 줄줄 새는 건물의 현관에 쪼그려 앉았다. 장우산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의 비명소리가 우스워서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웅덩이는 무엇 하나 비추지 못한 채 일렁이고 있으나, 이 비가 끝나면 무엇이든 비춰낼 것이다. 진흙탕은 그래서 인생을 닮았다고들 한다.
저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겠지. 그러나 내일은 조금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즐거워 웃을 수도 있겠고, 바보 같다며 서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댈 수도 있겠지. 나는 왜 하필 그런 생각을 했을까? 히어로 활동, 즐겁지도 않았는데. 왜 계속하자고 했을까…. 가끔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 있다. 신이 점지해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장대비로도 떨쳐낼 수 없는 것인지라, 우리는 이 퀴퀴한 반지하에서 생각보다 오래 함께할 예정인가 보다. 오늘 내내 비가 온다고 하였으니, 나는 내내 우산을 들고 현관에 앉아있기로 했다. 하지만 부엉이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보이지 않아도 그들의 복귀를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그야 우리는 우산이 하나밖에 없는 걸.
그러면 내일도 힘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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