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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세요, 오늘도 도시는 평화롭습니다! 뉴스의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회사원 셀리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 일어났다. 오늘 아침 뉴스도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고, 셀리는 밥맛이 도통 들지 않아 토스트조차 굽지 않았다. '최근, 이능력자들의 퇴출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세지면서….' 이능력자들인지, 외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에 혼란을 야기한다면 적절한 곳에 격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셀리는 이능력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소소하고 가벼운 도움들을 받았다면 받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러한 셀리도 이능력자의 퇴출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이 평화의 시대, 히어로가 굳이 필요하는가,였다. 가끔 태풍이나 지진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걸 꼭 히어로가 막을 필요 없잖아? 셀리는 잠들기 전에 잘 다려놓은 정장의 수트를 옷장에서 꺼냈다. TV는 아직도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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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수배된 5인의 행방이 묘연하여….' 셀리는 서류 가방에 모든 짐을 다 밀어 넣었다. 오늘은 중요한 계약이 있으니 실수하지 말아야지. 셀리는 아직 한참이나 여유로운 시간을 확인하고, 곧 집의 문을 열었다. 이대로 나가면 30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을 테니, 커피라도 사 마셔야겠어. 그런 셀리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날아든다. 쿠당탕! 벽에 금이 가고, 사람이 바닥을 나뒹굴며 쓰러져 있었다. 소시민 셀리가 어떠한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에이 씨, 쟤 괴물쟈나이카.' 셀리가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그는 헬멧까지 바로 고쳐 쓴 뒤 목을 풀었다. '너 빨리 안 와요?!' '아, 갈 거임!' 그는 셀리를 곁눈질로 확인하자, 멋들어진 인사를 함께하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 황당한 사태에 굳어있던 셀리가, 기어가는 걸음으로 집 바깥을 확인하니 노란 장미 안대의 여자가 그의 집 앞마당에서 누군가를 포획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 기분에 고개만 내밀고 있었더니, 갈색머리의 여자와 눈이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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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세요, 오늘도 도시는 평화롭습니다."
대체 어디 가요? 셀리는 말을 잇지 못했고, 그 이후 도망치듯 허둥지둥 떠나는 세 명을 바라봤다. 결국 셀리는 그로부터 19분이 지난 뒤 다시 걸음을 뗄 수 있었고, 그들이 수배된 다섯 명 중 세 명이었다는 것을 그날 저녁 뉴스를 보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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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음? 이번 작전 내 캐리 인정?"
"그런 사람이 맞고 날아가요?"
"응~ 그거 질투~"
"선배, 쟤 버리고 가요."
"응."
"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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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우리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함께 해야 하는… 일시적 운명의 공동체였음을 이해하고 있어. 근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있냐, 이거지. 한 사람만 정보를 독식해봤자 이로울 게 어디 있어. 그냥 다 같이 알고 있는 거지. 그런 면모로 글라우는 좀 꽉 막혔다니까. 안 알려주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다 친한 것도 아니고. 팀이라면서."
"하긴. 글라우를 빼곤 이름이나 제대로 알면 그만일 관계들이니까. 그래도 난 다른 애들이 나름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 지금 말해서 미안하지만 난 너네 이름만 알아."
"…."
"진짜로."
"……왕따?"
"나는 이 아지트의 고물보다도 섬세하고 여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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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월은 없는 사정을 굳이굳이 쪼개 구매한 색종이들 따위로 고리 링을 오려 붙이고 있었다. 이능력을 쓰면 눈 감고도 더 화려한 것을 반짝 만들 수 있지 않나, 싶지마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심심은 하니. 동심으로 돌아가보자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동심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애당초 이런 일에 이능력을? 굳, 굳이? 그렇게까지? 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게 없잖아 있기 때문에, 그의 손은 더없이 설렁설렁 느렸다. 앗, 풀렸다. 유한월은 느긋하게 색종이 고리 링을 이어붙이다가, 30cm 정도 만든 뒤에 포기했다. 성가셨기 때문이었다. 크레바스는 바닥을 수놓은 색종이들의 침대와, 그 위에 누운 유한월을 바라보며, 한숨처럼 남은 고리 링을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탈옥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이런 이벤트도 나쁘지 않지.' 그의 말에 유한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 나간 삼인방은 그들에 비해 한참 어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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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나도 삼십대면 늙은 편이 아닌데…?"
"쟤넨 감옥살이 빼면 20살 하고 21살이야."
"…네르샤는 낼모레 삼십대잖아."
"…… 하는 행동이 글라우랑 똑같잖아."
"하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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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사는 지하는 그래도 제법 사람 사는 집, 혹은 히어로들의 아지트 같아졌다. 노이즈가 심하고, 음질이 나쁜 TV와, 엉덩이가 푹 꺼진 소파. 그래도 한 사람당 한 개씩은 써야겠지 않냐며 억지로 억지로 구해온 이불들. 약 3년 전에 발행되어 지금과 도시의 구조가 약간 다른 지도가 놓인 거실에서 쉬고 있노라면, 이게 집이지 뭐가 집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뿐일까? 한쪽 구석에는 찌그러진 야구 방망이나 빠루 같은 것을 무기 대신으로 모아두었고, -전부 길에서 주운 것이다. 가끔 월세가 부족하면 집주인에게 사정사정하며 이거라도 팔겠다고 어필하는 용도 기도 했다.- 공수할 수 있는 현금을 박박 긁어모아 마련한 라면이나 쌀 등도 한쪽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크레바스는 퇴직금의 일부… 어쩌면 전부…를 썼다고 할 수 있겠다.- 소음이 심한 세탁기와 냉장고는 이따금 이상한 연기가 나거나, 작동을 멈추지만 그럭저럭 쓸만했다. 저번 주에는 전자레인지를 주워왔는데, 이게 또 요긴하게 쓸 곳이 많았다. 안에서 생선 비린내 같은 게 조금 나긴 했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우리들은 이런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닌데도, 제법 만족했다. 단칸방이 감옥보다 낫다고. 물은 좀 새지만 퍽 넓은 지하 아지트는 우리들에게 딱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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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딱 맞지는 않았다. 엊그제 바퀴벌레를 발견하고 나는 혼절할 뻔했다. 트리거가 잡아주겠다고 오더니, 같이 비명을 질러서. 결국 크레바스가 그 벌레를 발로 밟을 때까지 나는 트리거의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비유다. 진짜로 올라간 건 아니었다.- 이 사건을 놓고 트리거는 그날 내내 웃었지만. 왜 웃는 거야? 너도 못 잡았잖아! 나는 억울함을 꾹 눌러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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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구려요."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이 아지트 어떤 기계보다도 섬세하고…."
"구려요."
"울어? 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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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앞에 무장강도를 대충 툭 던져두고, 우리들이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에는. 삐뚤빼뚤하게 만들어놓은 종이 고리 링이 우리를 만기고 있었다. 없는 사이에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한 것 같은데, 이벤트고 뭐고 돈이 없으니 저게 최선이었나 보다. 나는 어설프게 꾸며진 벽과, 종이 고리 링을 바라보다가 웃어버렸다. 웃기지 않나? 귀엽잖아. 마치 꼭, 한 팀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서. 환영파티라도 하는 것 같아서. 하긴, 우리들이 탈옥 이후 긴장상태를 유지하긴 했지. 이러한 여유는 분명히 필요했다. 나는 그들이 투닥거리는 걸 말리지 않았고, 조용히 지팡이를 접었다. 크레바스는 그런 내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때. 높낮이가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기뻐. 하지만 내겐 쓸데없어. 크레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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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좀 못 만들었다. 저 이런 거 되게 잘하거든요. 저한테 시키지~"
"이만큼은 크레바스가 만들었어."
"너~~~ 무 잘 만들었다! 진짜 최고의 손재주, 와, 종이접기 계의 혁명."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