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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트리거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벼운 태도가 사라진 것은 어색하지만, 그에게 있어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지상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하에 자리 잡은 우리들은 천장에서 아주 조금씩 새는 빗방울을 바가지로 받으면서, 옹기종기 모여 이불을 두르고 있는 채였다. 난방이 안 되어, 몹시도 추운 탓이었다. 에취, 대답을 해야 했는데, 나는 재채기가 자꾸 나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보다 못한 네르샤가 관의 문을 열고 나를 집어넣고 나서야 나는 안정을 되찾고 계획을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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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글라우 뭐래냐."
"모르겠는데."
"헐, 맞다. 선배, 미안해요. 그거 방음 잘 돼서 안 들려요."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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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현재 이목이 집중된 수배자들이야. 백 퍼센트, 우리들이 전부 잡힐 때까지 두고두고 화자 되겠지. 어떠한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요 며칠 동태를 살펴보니, 정부는 우리를 다시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어. 간신히 찾아낸 단서는 십삼월의 대폭발뿐이라, 누명임을 입증할 증거가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아는 게 전혀 없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야. 세상의 관심을 우리가 아닌 죄로 돌리는 거야. 너네는 히어로였어. 이제 알아듣겠어? 앞으로도 계속 히어로 활동을 해. 정체를 노출시켜. 그렇다면 합당한 의문이 생겨나게 될 거야. '왜 저들은 히어로 활동을 할까?' 극악무도한 수배자들인데, 어찌하여 사람들을 구할까. 그 의문이 우리에 대한 추적을 느슨하게 만들 거야. 그러면 그때를 노려. 십삼월의 대폭발은 그때부터 조사해도 늦지 않아. 다행이자 불행으로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일은 아주 많이 일어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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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은 얼마 정도 잡고 있지? 한월이 가볍게 물었다. 그는 담요를 두르지 않고 타인에게 양보했는데, 나노봇 슈트만 입어도 충분히 따듯하단다. 하긴, 열악한 환경에선 가진 자가 하나라도 더 베푸는 것이 은혜라고들 하지. 나는 그의 배려를 기쁘게 받아 들어 담요를 다시금 둘렀다. 나 혼자서만 담요를 3개 덮은 꼴이 되었지만, 크레바스가 저것도 모자라다고 하는 것을 듣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고는 아까부터 말했는데.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냐고…! 어쩐지 비죽, 입술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삼 개월. 그 정도면 우리들은 충분히 주목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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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웅크려서 잠을 잤다. 비가 새벽 내내 내린다 하여,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리 개인행동이 좋다 한들, 물이 뚝뚝 새는 아지트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이들도 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다. 기껏해야 군인으로서 야외취침의 경험이 많을 크레바스만 이 정도면 괜찮다,라고 대답하겠지. 나머지들은 잠을 잘 수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교도소는 아주 비좁고, 어둡고, 퀴퀴했지만. 그래도 이것보단 조금 더 나은 환경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날이면 누군가 꼴사납게 훌쩍일 것 같았는데, 다행인지 아무도 훌쩍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또 서글퍼서, 눈을 꾹 감고 지팡이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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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가혹한 걸까?
우리는 그저 히어로로 존재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오면서, 나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오전이 맞는데, 창문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쉬웠다. 어제 말한 대로 우리는 오늘부터 히어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찾아내고, 억울함을 호소해가며 누명을 벗어야겠지. 할 수 있을까? 호언장담했지만, 나는 불가능의 경우를 예측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65% 확률로 실패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100% 실패할 수도 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으면 나는 아무런 이유도 꺼내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내뱉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 그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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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확신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무조건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말이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앞섰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