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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국가에서 정의한 히어로는 이능력을 갖거나, 그에 준하는 신체능력을 통하여 국가 질서 설립에 이바지하고, 특수 범죄를 제지하는 역할을 맡는 일종의 특수 경찰이다. 학력과 성별, 나이에 무관하나 일정한 기준을 통과해야만 히어로가 될 수 있는 편이었다. 국가에서 특수 기관을 설립해 그들을 한 소속으로 몰아넣고, 일반 회사에서 부서를 나누 듯 그룹을 나누어 활동시키게끔 하고 있다. 그들은 몇 가지의 특혜를 받는데, 그중 하나는 공동의 책임이었다. 한 사람이 임무에 실패한다 하여, 그 실패한 책임을 혼자 짊어지지 않는다. -경험 상, 뭇매는 혼자 다 맞긴 했다. 군중 심리가 그런 거지, 뭐.- 즉, 우리들은 서로의 실패에 조금은 너그러워질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혼자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같이 책임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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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특혜는 내가 주장한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 9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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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들이 범죄자가 되려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 했다. 탈세나 주가 조작 같은 건 내 통장 털어보는 것으로 증명이 가능하니 패스. 살인과 상해, 방화, 절도 -나는 이 죄목이 가장 황당했다. 대기업 CEO의 2세이자 경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큰 손이었던 내가? 굳이?- 따위로 잡히기엔 부족했다는 뜻이다! 물론 해당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이 멍청하고 높으신 분들아. 댁들이 현장을 뛰어본 적 있는가? 무장한 강도들과, 이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미친놈들을 상대해본 적 있냐는 말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누가 죽였는지 모를 시체가 빈번하게 드러나고, 내가 입힌 상처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상처 입은 사람들이 분명히 생겨난다. 요즈음에는 범죄자 인권을 챙겨준답시고, 빌런들을 제압한 히어로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더라. -나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히어로의 처벌 기준은 높았다. 어지간해선, 범죄자로 전락시키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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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글라우코피스는 싸운 적 없지 않아?"
"응. 난 비전투인원이니까. 보호받기 바빴고. "
"근데 네 죄목이 뭐라고?"
"살인, 상해를 중점으로 방화랑 절도, 주가조작이랑 탈세까지."
"얘네는 정보 조사도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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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이에요."
"누가 그걸 모르니."
"아니, 그렇게 단순한 누명이 아니라. 뭔가를 덮기 위한 누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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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함께 활동한 시간이 없다. 물론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조금조금씩 같이 일하긴 했다만. 길어야 1년, 그 기간 동안 서로를 소개해준 적도 없다. 그뿐이랴? 같이 교도소에 들어온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서류 상으로 확인만 하고, 마주친 적 없는 관계라는 뜻이었다. 나처럼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그마저도 확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들 중 몇몇은 공범으로 잡히기도 했는데, 이런 초면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수가 있을까? 우리들은 같은 날에 수배가 떨어지고, 비슷한 시점에 교도소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에 대한 이유를 대략적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십삼월의 대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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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 현장으로 투입된 이들은 몇 없었다. 기껏해야 나를 포함한… 둘셋?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건과 큰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내가 범죄자가 될 일은 그것밖에 없다 생각하면서도, 이들과의 공통점을 찾지 못해서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그들에게 교도소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면 해결될 일 같기도 하지만,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가 조작된 이유는 물을 가치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들의 자긍심을 들쑤시는 짓임을 알고 있었다. 해서, 나는 그들을 위해 침묵을 택했다. 누명을 벗는 일은, 꼭 진실을 널리 알리는 모습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혓바닥 하나는 내가 잘 놀리지, 어디 한 번 오랜만에 협상가 다운 짓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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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이렇게 된 거, 그들과 협상을 할 거야."
"우효. 너 그렇게 말하니까 좀 멋져 보인다."
"난 원래 멋졌어."
"에."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사고 치지 마. 내일이면 우리 수배 풀리니까, 옷이나 사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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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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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눼일이면 수배 풀뤼니까~"
"……."
"……잘못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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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거 큰일 난 거 맞지? 제삼자도 꼴 받을 만큼 얄미운 트리거의 말투에도 반응이 없잖아."
"그… 런 것 같은데요? 아니, 저 선배 협상하고 온다며. 근데 갑자기 왜 저런대요?"
"협상 갔다가 죽을 뻔했대."
"와우. 실패라는 거죠?"
"응, 실패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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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세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묻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마련한 차를 타고, 정부 직속 기관에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다만, 해당 기관의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히어로 '만' 맡고 있는 국가정보원, 뭐 그런 느낌의 기밀 기관이었다. 근데 나는 어떻게 아냐고? 나는 그 기관의 협력자였으니까. 여하튼, 내 누명을 벗겨주지 않은 건 괘씸하지만. 그래도 최대의 협력자이자 히어로 정비 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나를 내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제라도 내가 부탁하면 누명을 벗겨주겠지, 우리 다섯 명 다 화려하게 복귀! 공 세우기, 짜잔! 제 이름을 되찾고 다시 사회에 녹아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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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가 쥐덫까지 찾아온 배짱은 높게 사마."
"쥐새끼로 나를 지칭하는 건 너무 상도덕이 없지. 긴 말 하게 하지 마, 내 요구사항은…."
"기각 하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쥐새끼의 말을 듣는 인간이 세상에 어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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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무사히 살아 나올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래서 인맥 빨, 하는 건가 보다. 기관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리고 차에서 완벽히 내리기도 전에 처리하라는 이야기를 들어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끔살 당해 지하 60피트 밑에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내 친구들이 -아까 말한 뒷 세계의 사람. 엄밀히 말하면 친구는 아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급하게 장소를 떠나는 것을 재촉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릴 쫓아온 건 아니었지만. 나는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의 눈에 고인 감정을 읽힌다. 경멸. 혐오. 미묘한 불안과, 명백한 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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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코피스, 잠들었어. 이제 숨 쉬어도 돼."
"그래서, 선배가 뭐래요?"
"우릴 죽일 생각인 것 같대."
"왜?"
"본인도 그걸 모르겠다고 울던데."
"울어??"
"울어???"
"응, 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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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코피스가 잠들어 있는 사이, 크레바스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얘기한 거. 글라우코피스에게 얘기할 거야?"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자신의 생존, 명예와 삶이 걸린 일이었다. 한 사람, 그것도 온전한 신뢰가 아닌 불완전의 믿음으로 구축한 관계의 타인에게 맡길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기 때문에. 한월이 조용히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말해줬다가 멘탈 나갈 것 같은데, 걘." 그들은 글라우코피스가 없던 각자의 시간 동안 저마다의 해결책을 강구했다. 변변찮은 소득이 있었다곤 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다, 싶은 것을 찾아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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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월의 대폭발. 그 사건 이후로 전부 수배령이 떨어졌잖아. 공식적으로 파견을 나간 이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전부 죽었는데, 비공식적으로 현장에 나간 애들이 더 있었어. 맞지?"
"일단 저만 해도 그 근처로 나가보라는 얘기가 있었으니까요. 마냥 무시하기도 껄끄러워 나갔는데…. 이상하죠?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누가 때려죽일 거라며 협박해도 못 떠올릴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데? 그러니까, 앞 하고 뒤는 기억나.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 뭘 했는지 저~~~언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긴 한데. 누가 거기에 얼마나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졌고, 왜 내가… 도심 한 복판에 서서 눈을 떴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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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충돌.
찬란하게 쏟아지던 흰색 빛.
우린 그곳의 중앙에 서서 춤을 췄어.
경멸도, 무시도, 무엇 하나 두렵지 않았어.
당신이 사랑한 세계는 분명 찬란한 백색의 나날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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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껄끄럽긴 한데. 그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어. 적어도 현재까지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정보는 제로, 전혀 없다는 건 분명해."
"… 근데."
"네?"
"그 장소, 극비 구역이야."
"에, 갑자기."
"비밀 군사 작전을 진행했던 곳이거든. 옛날에 가봐서 알아."
"에?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