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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아, 세상에, 신이시여. 키르케의 간사한 꾀에 넘어가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번 생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인생이라는 건 우습군요. 이렇게 불합리한 세상을 만든 당신이 제법 밉지만. 네에. 그래도 저는 절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오늘은 용서해드리지요. 나를 깎아 내리지 않고, 웃으며 응해주는 다정을 받았으니. 그 정도의 자비가 샘솟더랍니다. 

 

 

생각이 끊어짐에 이유는 없다. 기껏 처치해둔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드는 것을 방치한다. 그냥 미온을 잡아당기고,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기대서 울었을 뿐이었다. 모든 말을 정해둔 나로서는 이례적이지만, 그래. 울보인 나를 이렇게나 아껴준 네게는 익숙하려나.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들은 위로. 몇 번이고 흘려 넘긴 빗방울. 최악을 면하기 위하여 고른 선택. 당신이 느끼지 못할 고통. 내가 알 수 없을 우울. 후련함을 느끼기까지 우리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케케묵은 비밀을 파헤친다는 건 대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안도감은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이렇게 간사하고 제멋대로인 종족이다. 

 

'다음'을 논하고, '다시'를 논할 수 있는 건, 그래. 여전히 강한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강하지 않지. 마음이 약해서 그래. 모질게 대하는 걸 힘들어하면서 선을 그어놓는다. 넘는 이들을 용기 있다 칭하지만, 정작 제 자신은 용기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솔직해지는 건 여전히 무섭고, 솔직함을 듣는 건 여전히 두렵다. 그런 내게도 잘하는 것  하나 정도는 있었다. 놀랍지? 나도 놀라워. 어리광 부리는 건 이제 졸업해야 하는데. 나는 언제쯤 어른스럽게 웃으며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조금 많이 울었다. 원래 인생은 빗방울 론도. 울음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세상. 남들보다 조금 더 울어도 토닥여줄 온기가 있다는 것만이 행운인 이 시대에서. 응. 그래. 그때가 오면. 내가 너무 많이 상처받게 되더라도.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이 바다에 가라앉아도 네가, 역시 내내 빛났으면 좋겠어. 이것도 어리광이야? 감당해줬으면 좋겠어. 그냥 징그럽다며 나가면 될 일을, 꿋꿋하게 버텨서. 괜히 다정하게 굴어서.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잖아. 우울에 희망을 심는다는 건 원래 고된 일이야. 네가 남의 마음에 멋대로 심어놓았으니 네가 감당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으면. 미온, 나 좀 많이 아픈 것 같아. 응, 아니, 아프다. 일단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고, 소리도 잘 안 들려. 손 끝도 아프고. 아, 중복 증상 아니냐고? 아니야, 들어봐. 이제는 마음까지 아파. 배신 당한 것 같아. 원망이 사그라들질 않아. 죽여버리고 싶어. 그렇지만 죽이진 못하겠지. 이건 아픔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더 아픈 곳이 없느냐 물었잖아. 난 감정도 고통으로 여겨. 여전히 내내 아파. 그러니까. 응. 응….

 

돌아보는 것도 힘들고, 일어서는 것도 무섭지만. 밤은 길고, 인생은 끝없이 걷는 고행길이지. 내일을 걸어야 하니까. 상처받기 싫으니까. 조금만 더 옆에 있어주라. 아니, 그냥 오늘 같이 자주면 안 돼? 나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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