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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도주

침대 위에 앉자, 모든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살의도 사그라들고, 고통도 멀어져 간다. 누군가는 정신을 놓으면 쉽게 편해질 수 있다던데. 그게 이래서인가? 구급상자를 바라본다. 흰색이 유독 아득하게 느껴져서 어깨가 움츠러든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집착하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네 이상과 목표를 정립하면. 더 멀리 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그리고 넌 해냈지. 내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더 완벽하게, 멋지게. 그게 꼭 내 조언 덕분이었을까? 이 순간 새삼스럽게 의문이 든다. 너는 왜, 나를, 골랐을까. 세이렌에게 미온은 그저, 한없이 강한 사람이었다. 본질부터 다르기 때문에 동경하게 된다. 우리 둘은 너무 다른 점이 많지. 사는 세상이 다르기도 할 거야. 너는 휘어지지 않을 거야.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그 상처를 딛고 새 싹을 틔우겠지. 겨울이 와도, 봄이 와도. 너는 내내 푸르를 수 있을 거야. 강인함은 늘 그렇게 빛나.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야. 확신해. 감히, 내가, 확신하고 있어.

 

하지만 미온, 나는 달라. 대비책을 세운 이유는 최악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야. 세이렌이 왜 바다에 몸을 쳐박았는 지 알아? 날개를 죄 꺾고, 물에 목소리를 내어주며 죽어버린 이유를, 너는 알고 있어? 최악을 극복하면 봄이 찾아와. 하지만 나의 봄은 늘 최악을 닮아 있어. 딛는 순간 스네구로치카처럼 녹아 죽어버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너처럼 생각할 수가 없을 거야. 미온. 나는 늘 궁금해.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이런 성격, 이런 사상, 이런 마음을 갖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건 제법 신기한 일이잖아. 너도 그걸 알 텐데. 어렴풋 눈치챘을 텐데. 너는 무슨 생각으로 내 웃음을 되찾아주려고 했니? 행복하지 못하니, 울음으로 나를 지켜야 하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내 울음을 멎게끔 해주겠다 한 거야?

 

마음이라는 건 이렇게 엇나간다. 삐죽 솟은 가시는 사랑에게도 동일하게 끝을 내보인다. 비명이나 앓는 소리는 새지 않았다. 식염수가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경련하듯 움찔거리는 행동은 있었지만, 반항이나 저항은 별달리 보이지 않았다. 눈물 자국은 여실한데, 어쩐지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세이렌이 고개를 살금 숙이고, 미온과 고개를 가까이한다. 미온. 목소리가 가볍게 갈라진다. 난 무너지면 다음은 없어. 다음은 존재할 거야. 너는 그것을 자신있게 얘기했지만. 응, 나는 이 순간에도 다음이 상상 되질 않았다. 도망치는 것만이 내 생존 전략이야.

 

솔직히. 이해를 바랐다면 나는 그 전부터 너에게 터놓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웃으면서, 울면서. '사실 이래.', '진심은 이거야.' 따위를 논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엇도 하지 않았지. 어째서, 라고 묻는다면. 그냥. 믿음에 보답해주고 싶었어. 책임감을 느꼈고, 의무감을 가졌어. 이런 사람에게까지 다정한 네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았어. 이건 미련함일까? 웃음이 실실 샌다. 아, 오늘부터. 울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지킬 마음이 없으니까.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붕대 감긴 손가락은 여전히 잘 움직이질 않았다. 감각이 송두리 째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너는 좋겠다. 나는 네가 내내 좋을 것이다.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도 즐거울 테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도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응, 실망하려나. 이것도 못 견뎌내는 나를. 이렇게나 겁쟁이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려나…. 

 

무너져도 다음을 꿈꿀 수 있는 건 강한 자의 특권이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이야기했지만, 너보다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준 이는 없을 거야. 고마워. 하지만 무리야. 내게, 조언하지마. 내 발버둥을 멍청한 짓으로 만들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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