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격조하셨습니다.
자리에 나타난 것은 흑발의 사람이었다. 길고 긴 흑색 비단결 머리카락을 히메 컷으로 자른 그는 붉은색 눈을 침울하게 뜬 채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흰색의 원피스를 입었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워커 부츠를 신고 있는 채였다. '바닐라'의 것보다 콧대는 조금 높았고, 턱은 조금 더 갸름했다. 햇빛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유독 두꺼운 입술. 얇은 눈썹과 짧은 속눈썹으로 하여금 '지명수배지'에 실려있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행색이었다. 목소리는 유독 낮고 허스키해, 도저히 바닐라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 지명수배자 중 이런 얼굴은 없었는데. 마이클은 조금 당혹스러움에 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시 열었다.
에덴의 1급 지명수배자, '바닐라'로 알려졌던 크림휠입니다.
에덴에 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으니 각설하겠습니다. 사실 제게 에덴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르카디아도 중요한 것은 아니거든요. 세상이 어떻게 되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일종의 자백이고 고발입니다. 저는 저의 죄를 전부 인정하기 때문에, 현 레기 정권에 대한 고발을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우선적으로 저의 죄는 정확하게 네 가지입니다. 첫 째. '바닐라'라는 시민의 신분을 도용한 죄. 둘째.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마땅한 '특수 폭행.' 셋째. 이지스 집권 시절, 그의 제1 비서관을 살해한 죄. 넷째. '아르카디아'에 대한 발언으로 레기의 심기를 거스른 의원을 살해한 죄.
저는 아르카디아에서 넘어온 식용아입니다. 에버글로우 하우스에서 나고 자랐으며, 라딕스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운명을 비관하던 아이였죠.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삶이었습니다. 가장 웅장하다고 생각했던 시설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음은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생각일 겁니다. 저는 살고 싶었고, 아주 어렸으며, 타인에게 위탁하지 않고서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던 겁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르카디아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에덴은 생각한 것보다 다정했고, 상냥했지만, 식용아라는 인식이 두려워 에덴에서 이지스, 그리고 레기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난 '바닐라'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껏 알려졌던 저에 대한 모든 정보는 그를 모방한 것으로.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숨을 참았다. 지친 낯이 웃기 시작하자, 누군가는 동정의 눈빛을 흘려보내고 말았을 터다. 저로 인해 피해를 입은 그분께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번째 죄일 겁니다. 그리하여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에덴의 제1급 지명수배자, 크림휠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하여 바닐라는 바닐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나 자신을 위해 몇 번이고 화장을 고치고, 몇 번이고 대본을 짜는 건 익숙했으니 말이다.
이후로부터의 나열은 단순했다. 최초의 범죄자가 된 이유에 대해서 열거하고 나니, 크림휠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저를 범죄 현장에 가담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패는 현장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으슥한 뒷골목에 두어명을 무릎 꿇리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보셨는지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고자 했고, 그런 짓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죄이겠지만, 저는 정당함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말이 끝나고, 크림휠은 잠시 눈을 가렸다. 울음이 새어 나와서인지, 아니면 감정이 북받쳐서인지. 그러나 하우스에서 나고 자라 바닐라를 아는 이라면 그것은 그저 렌즈로 인해 눈이 뻑뻑해졌을 뿐인 행동임을 쉬이 알 수 있었을 터다.
그리하여 저는 범죄자가 되었죠. 식용아라는 이유로 정당성 한 번 인정받지 못한 채 레기의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를 두고 이리 칭했죠. 변장도 좀 할 줄 알고, 총도 다룰 줄 안다. 식용아며, 입양 예정도 없으니. 이보다 훌륭한 패가 더 있을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그리고 가장 소중한 가족들을 담보로 하여 협박받았습니다. 이 사람을 죽이라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게 은혜를 베푼 자의 비서관을 죽이려 들겠습니까? 그러나 레기는 저에게 약속했습니다. 죽인다면. 안전과 자유를 약속하겠다고. 세간에서는 의문사로 기록될 것이며, 그 어떤 형태로도 구속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셨는 줄, 아시나요. 크림휠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이 꼴입니다. 사람을 한 명 더 죽였고, 저지르지도 않은 수십 개의 죄를 짊어진 꼴이, 그와 나눈 약속의 형태입니다.
레기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 뒤로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는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이고, 수십 개의 건물을 불태웠으며, 중요 기밀을 빼돌리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습니다. 제가 왜 검거되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레기는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원하였고. 그리하여 더러운 것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으며. 운이 나쁘게, 그것이 제가 되었을 뿐인 겁니다. 크림휠은 카메라를 돌아보며 웃었다. 초연한 웃음. 그러나 거짓이 만연한.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바닐라의 신분을 도용했다, 라는 대목에서부터 거짓말이 선명하니. 이것은 사실에 의거한 대 사기극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바닐라는 속으로 죄목 하나를 덧씌웠다. 사기. 바닐라는 안타까움에 지배당한 마이클을 바라보며, 속으로 쾌거를 부르고 말았다. 뭐야, 내 실력 아직 안 죽었네.
그 뒤로부터는 순탄했다. 일련의 나열은 그간 바닐라가 얼마나 칼을 갈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허술하게, 혹은 철저하게 누명을 쓰고 말았는지에 대해 증명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파우치에서 몇몇 개의 단서와 증거들을 꺼내 증명하는 것은 일종의 추리와도 다를 바 없었다. 적안 속에 새까맣게 가라앉은 동공이 분노를 이야기한다. 크림휠은 레기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언제나. 그것을 한 번 억누르고, 겨우겨우 고발의 길을 택한 것은. 더 이상 불안에 떨며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 조각,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한 조각.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들이, 그것을 원치 않음이 두 조각. 크림휠의 묘사는 자세해져갔고, 그가 제시한 '누명'은 제법 상세했기 때문에. 충분히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총 38건의 살인, 24건의 방화, 46건의 특수 폭행과 3건의 마약 유통, 22건의 절도에 대한 합리적인 해명을 제시하고 나서. 바닐라는 그 누구보다 말갛게 웃을 수 있었다. 변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진심에 대해, 바닐라는 시시하고 끔찍한 이야기였노라 회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에덴으로 돌아간다면 제 제판을 진행해주세요. 크림휠은 마지막 말이 끝나자, 카메라가 돌아갈까 황급히 덧붙였다. 이미 크림휠의 자세한 고발로 인해 수십 분이 지체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버틸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내가 마땅히 벌해져야 할 권리를 빼앗지 마세요. 씌울 죄가 아직 남아 있다 하여, 제발 감옥에 넣어달라 빌고 있는 나를 사회로 다시 내치지 말아 주세요.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도록, 그리고 영원한 약자로서 핍박받지 않도록. 한 번만, 도와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존경하는 에덴의 여러분들.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무지에 대한 죄를 인정하고,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식용아, 라는 이유에서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모든 혐오와 경멸을 멈춰주시길. 그리하여. 언젠가 제가 세상을 다시 올려다 보았을 때. 무척 다정한 세상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고발의 끝을 알리고, 카메라가 돌아가고 나서야 그는 잔잔한 웃음을 거두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바닐라는 잠깐의 침묵을 지킨 후, 소리 없이 훌쩍훌쩍 울어버리고 말았지만. 크림휠의 고발은 퍽이나 성공적이었을 터다. 그래야만 했다. 바닐라는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녕, 나의 사춘기. (0) | 2021.07.16 |
---|---|
. (0) | 2021.07.15 |
온도. (0) | 2021.07.13 |
검거 30분 전. 공중전화. (0) | 2021.07.13 |
뒤늦은 이해, 뒤늦은 다정, 그리하여. (0) | 202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