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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외전 - 스물다섯 장의 편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소를 적지 못해, 편지를 보내지 못했지만.
단 한 순간도, 편지를 소중히 대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스타작가 페르세포네 씨를 모셨습니다!

 

 

힘찬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진다. 사회자는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뻗어 무대 안쪽을 가리키자, 사회자의 손짓을 따라 무대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쨍하게 비친다. 온갖 시선과 조명을 받으며 무대로 걸어 나온 사람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작고 어려 보이는 사람.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객석에 앉아있던 모두가 손을 모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레와도 같은 함성에,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인 사람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페르세포네의 등장이었다.

필명 페르세포네. 본명은 공개된 바 없음. 미성년자의 나이로 각종 문학상을 휩쓸어 등장한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천재. 꾸준히 페르세포네, 라는 이름으로 투고했으며 주최 측에 본명 대신 필명으로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넣어 신비주의처럼 굴고 있는 당돌한 사람. 성인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글을 투고하였으며, 하나하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각 글마다의 문학적 가치는 상당했다.

 

개인 블로그에 새로운 단편이 업로드되면 순식간에 몇천 만의 조회 수를 돌파하고, 출간을 요구하는 반응이 뜨겁게 블로그와 SNS를 달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야 많았지만, 페르세포네는 언제나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이대로 천재 작가의 책을 잃는 건가, 계속되는 페르세포네의 수상과 신작에도 불구하고 출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인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말과 함께, 페르세포네는 많은 이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책 한 권을 출간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페르세포네가 손수 적어 내린 글들은 대체로 SF 공상과학이나 판타지 계열의 글들이었다. 주 분야는 현대 판타지, 그러나 철학적인 내용이 은근하게 숨어들어 간 것으로, 로맨스가 첨가되지 않은 담백하고도 어두운 분위기의 글들을 주로 써 내리곤 했다. 대단히 참신한 소재라거나, 엄청난 필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페르세포네의 글이 이토록 열렬한 성화를 입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공감성에 있었다.

 

활자로 된 것은 여러 명의 상상에 따라 풍경을 달리하지만, 페르세포네의 책은 어느 누가 읽어도 비슷한 풍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사실적이면서도 그것에 몰입하게 만드는 공감성은 말라비틀어진 동심의 소유자에게도 현실 너머의 초현실을 그려주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힘든 현실의 나날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새 세계에 몰입하고 빠져들 수 있는 글은 숨구멍이 되어주는 법이었다. 그래서 페르세포네에 대한 추종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런 와중, 페르세포네의 명성이 지금처럼 뛰어오른 결정적인 책 한 권이 출간된다. 작가 데뷔 이 년도 채 채우지 않고 집필한 장편 소설 <명계>는 페르세포네를 현대 판타지의 거장으로, 그리고 차세대 문학계를 이끌어나갈 천재 작가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올해의 문학상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심사위원 전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명계>를 지목한 것은 두고두고 구전될 전설과도 같은 일이었다.

 

훌륭한 글은 그 뒤로도 끊이지 않았다. 어찌나 많은 글을 썼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아껴만 두었는지. 올해 페르세포네는 스물다섯 살이 되는데, 출간한 책은 ■■권이 넘어간다. 전부 다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등단이 되었고, 히트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작가 데뷔 5년 만에 이룬 쾌거였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였다.

 

이런 선풍적인 인기에 한몫하는 것은, 페르세포네가 각종 인터뷰나 언론을 넘어 예능과 시사프로그램 등 대중에게 얼굴을 자주 비춘 탓도 있었다. 안 그래도 인기가 좋은 작가, 언제나 훌륭한 글을 써내는 것도 모자라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올 정도로 노출도가 잦다는 점이 페르세포네는 스타 작가, 라는 호칭에 걸맞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와 지지도를 갖게 되었다. 흑 보랏빛 머리카락을 곱게 풀어 헤치고, 붉은 눈을 접어 웃는 것만으로도. 객석에 모인 백 명 중 아흔 아홉 명이 쓰러진다나, 뭐라나. 그렇게 대단한 인기를 몰고 있던 작가였다. 어쩌면 웬만한 연예인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열기는 비단 그런 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작년 스물넷의 생일. 그러니까, 99일이 다 끝나는 늦은 저녁, 돌연 휴식기를 선언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각종 인터뷰에서 글을 쓰는 것, 상상을 풀어나가는 것이 너무 즐겁다. 그러니 글을 놓거나 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는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글을 쉬고 싶다는 장문의 이야기를 SNS에 늘어놓았지만, 문장을 뜯어 살피면 그것은 글을 쓰지 않겠다.’라는 통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페르세포네의 통보는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퍼져나갔다. 기사로도 수없이 올라왔고, 동영상 플랫폼에는 페르세포네가 글을 쉬는 이유, 따위의 주제로 영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정작 소속사와 페르세포네는 모든 입장을 내 걸지 않고 침묵했지만, 세상이 떠들썩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휴식 기간 동안 페르세포네의 글이 여러 미디어 맥스로 뻗어 나갔고,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렸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나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로부터 12월이 될 때까지 페르세포네의 SNS 계정과 신작 소식은 거의 동결되어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사람이 페르세포네를 찾았지만, 페르세포네는 놀라울 정도로 단 한 번 응해주지 않았다. 인터뷰도 거절했고, 미디어 맥스 계약 건으로 본인이 등판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페르세포네의 휴식기가 길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겨우 사그라지던 1225. 페르세포네의 SNS 계정으로 한 문장이 업로드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기억하고 있나요.

 

 

페르세포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아끼지 않고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의 해석과 깊이를 더해주기 때문에 사람들도 좋아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적인 이야기나 기분은 잘 업로드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이번에 업로드된 문장은 아리송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신작과 관련된 이야기라 들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는 이야기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해명은 이어지지 않았고, 다시 페르세포네의 계정은 동결에 가까울 정도로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이 더 지났다. 페르세포네의 휴식기는 유례없을 정도로 길어지고 만 것이었다. 사람들은 작가 페르세포네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갔지만, 워낙 소식이 알려지지 않아 죽었다.’ 따위의 설도 돌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단 한 번도 답해주지 않았고, 차기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페르세포네는 그렇게 전설적이었던 천재 작가로 이름만 남긴 채 사그라드는 듯싶다. 관심은 너무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었고, 사람의 명성은 언제나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45. 돌연 서점 중앙에 신간 한 권이 당당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저자의 이름은 페르세포네. 긴긴 휴식기 끝에,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그가 새로운 책을 출간한 것이었다. 책의 제목은 ■■■■■. 평소에 써오던 현대 판타지 소설보단, 그 안에 담겨있던 철학적인 질문의 성향이 더 강한 책이었다.

 

그 책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는 황폐해진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름 없는 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생존자를 찾아 나가면서 이름을 되찾아나가는, 그리하여 끝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살아남은 와 죽어가는 사람들,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를 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이 녹아있는 책이었다. 나는 누구인지, 내 이름은 무엇인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한 이유는 무엇인지 끝없이 알아가는 내용이었으나 아이의 깨달음은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저마다 다른 감상을 남길 수 있는 오픈 엔딩으로 끝나는 내용이었다.

 

■■■■■는 문학적으로 완벽하다, 불릴 정도로 잘 짜인 책이었다. 과연 천재 페르세포네가 휴식기 내내 붙잡은 글이 아니었을까,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문학적인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존재에 대한 질문은 어딘가 불쾌할 정도로 집요하여, 약간의 소름 끼친다거나, 불쾌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호불호가 갈리는 와중에도 페르세포네가 써낸 그 어떤 글보다 뛰어나고 완벽하다며, 올해에 이 이상의 소설은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와 평소 페르세포네, 라는 이름의 명성으로 인해 페르세포네의 신간, ■■■■■는 출간 하루도 채 되지 않아 50만 부 판매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인지. 출간 다음 날, 46일이 되는 새벽 1시경, 동결되어있던 페르세포네의 SNS로 게시글 하나가 업로드되면서, ■■■■■에 대한 관심은 더욱 폭발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열두 권의 책과 편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슨 글이지. 사람들은 모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도 이 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새로운 게시글이 업로드된다면, 그건 당연히 복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판매 실적에 대한 감사 인사일 것으로 추측했다. 모두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괴짜처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책의 홍보를 위한 글이라기엔 책과의 연관성이 없었고,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부가 설명도 없었다. 이후로 또다시 페르세포네는 게시글을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시간 안에 100만 부가 판매되면서도 사람들은 궁금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페르세포네의 문학적인 명성이 높아질 뿐이었다. 그렇게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차기작 소식 대신 각종 미디어 맥스와 계약한다는 소식만 줄줄 새어 나오면서. 꽃이 저물어가고 푸르른 잎사귀가 피어나는 55, 페르세포네가 공식적으로 강단에 선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 방송사에서 스타작가 페르세포네를 강연에 초청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리자마자, 사람들은 웬만한 유명 연예인 팬 미팅 못지않은 화력으로 해당 강연에 참여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폭풍 같은 한 달이 지나가면서, 오늘. 페르세포네가 드디어 강단에 올라서기로 했다. 독점 인터뷰 역시 관객들을 모시고 진행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간 오리무중이었던 페르세포네의 속내를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평소보다 훨씬 더 열띤 반응을 보이었다. 페르세포네는 저마다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관객들을 하나, 하나 눈으로 살피면서 사회자가 내민 마이크를 받아들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찬란의 웃음이었다.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받는 페르세포네를 바라보면서 가벼운 농담으로 입을 열었다. 페르세포네 씨는 말이죠, 원래 고상한 이미지로 활동하셨던 거로 아는데. 페르세포네는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능청스럽게 마이크를 톡톡 두드렸다. , 맞아요. 작가의 이미지, 라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사회자는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떤 이유로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주셨나요? 페르세포네는 오늘따라 높게 올려묶은 양 갈래의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이라서요. 가족들이 자주 묶어줬거든요.

 

사회자는 그런 페르세포네를 모니터링 화면으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화목한 가족이로군요. 페르세포네는 벅차 보이기까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사랑이 넘치는 가족들이었죠.

 

이후, 사회자는 몇 번의 말을 더 얹었다. 페르세포네에 대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의례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이곳에 온 누구도 페르세포네에 대해 모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설령, 페르세포네라는 이름을 모르더래도 그가 집필한 책의 문장 몇 개를 읽어주면 아, 그 책? 이라며 아는 체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페르세포네는 자신을 칭송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개를 들으면서, 팔랑거리는 원피스 자락의 끝을 매만졌다. 낯간지럽다는 투였다. 이 정도로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인가? 내가? 그런 생각이 일순 스쳐 지나가는 눈동자는, 사회자의 소개가 끝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페르세포네 씨의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소리에, 고개를 천천히 든 페르세포네는 마이크를 고쳐 잡았다. 아아. 페르세포네는 가볍게 스피커의 소리를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내며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페르네입니다. 그것은 이 강연을 위해 만들어낸 대본과 다른 것이었다. 성은 에트르, 이름은 페르네. 그리하여 페르네 에트르라고 합니다. 안녕하셨나요. 방송사고였다.

 

방송작가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PD는 고민 끝에 계속 진행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강연에 참석한 기자 중 한 명은 벌써 [속보], [특종] 따위의 말머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세포네는 신비주의로 활동하는 사람이었고, 사생활이나 개인정보에 대해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주의였다. 기껏해야 필명, 외모, 나이가 전부였기 때문에. 만약 페르네 에트르가 본명이었다면 이건 엄청난 발표인 셈이었다. 페르네는 술렁거리는 관객들을 눈에 담으며, 태연스럽게 한 걸음 나아갔다. 99일은 제게 있어 특별한 날입니다. 생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역시나 대본에는 없던 이야기였다.

 

저는 그날 잠에 들었어요. 아직 이른 오전이었으니, 잠깐의 낮잠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페르네는 이 모든 소란스러움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일이라서 그랬을까요. 제법 엄청난 꿈을 꿨지 뭐예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강연 주제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페르네는 그에 관해 이야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코웃음을 치듯이 웃으며, 여유롭게 무대 위를 걸어 다닐 뿐이었다.

 

여러분들은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역사에 기록되어야만 존재가 증명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기억에 남아야 존재를 남길 수 있는 걸까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의 무게를 지니고 있고, 죽어버린 것은 얼마나 가벼워지는 일인 걸까요. 여러분들은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고민해 보셨나요? 술렁이던 관객들이 조용해졌다. 페르네가 내던진 질문은, 페르세포네가 집필한 책, ■■■■■가 끝없이 던지던 질문을 닮아 있었다.

 

꿈을, 꿨다고. 이야기했지요. 저는 존재가 사라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저를 기억하지 못했고, 역사 그 어느 곳에도 제 이름이 적히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존재하고 있었고,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존재하는 걸까요.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지워진 사람을 그려낼 정도로 품는다는 것은 일종의 사랑이죠. 그것이 경멸을 동반한다 해도 말입니다. 그러니 저도 그들을 열렬하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 해도 말이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고 있어요. 그것은 어딘가 고백을 닮은 말이었다. 당신들에게 저는 어떤 존재일까요. 어떤 존재로 기록되었나요. 우리의 추억이 기억나시나요? 제 이름은요? 관객석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가 내리 앉았다. 페르네만이 태연하게 웃으며, 여전히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낼 뿐이었다.

 

프랑스어로, 존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아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 에트르, 라는 단어예요. 저는 그 말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끝없이 기록되고,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생을 걸고 끝없이 나에 관해 이야기하곤 하죠.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나는 나를 증명하고 있어요. 봐주세요, 어서요! 이런 발악에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유가, 희망이, 꿈과 낭만이 존재하는 행동일까요? 제가 쓴 책을 읽어보셨다면, 마지막에 그 아이가 어떤 것을 깨달았는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 자신의 이름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해석이 갈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답을 내리셨나요? 스스로, 답을 찾으셨나요? 저의 경우는, 존재는 기억으로 계승된다 생각하기 때문에.

 

강단 밑으로 스태프 좌석이 소란스러웠다. 점점 더 강연의 주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PD조차도 재재를 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몰아치는 부담감과 압박감. 끝나지 않는 마감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슬럼프, 따위에 관한 이야기는 페르세의 눈빛 속에서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PD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저질렀다. 페르네가 대본을 완벽히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페르네는 강단의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걸어 도착했다. 카메라를 올곧게 바라보면서, 페르네는 무대 위로 올라오는 스태프들을 외면했다.

 

 

아주 오랫동안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다음 생에서도요.

 

 

작가님! 거대한 방송 사고의 현장에서 태연한 것은 페르네 혼자였다. 고요에 짓눌렸던 관객들이 다시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소란을 뒤로하고, 페르네는 입술을 떼어냈다. 편지를 썼는데. 도저히 주소를 모르겠어요. 스피커의 하울링과 섞여, 사실 잘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벅찰 정도로 환했던 미소는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우울해져 있었는지. 슬픈 미소가 페르네의 얼굴을 지배해서, 보는 이가 다 먹먹해지기도 했다. 아직도 저는 기억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제 존재를 인정해 주시는지. 절 기억하고 계시는지. 페르네의 목소리가 하울링에 섞이는 와중,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의 전원이 내려갔다. 그러나 카메라는 아직 페르네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지막 문장의 입 모양이 화면을 타고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열두 권의 책을 남겨두었습니다. 열두 권의 편지 역시 남겨두었습니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하여 열세 장의 편지를, 내일 매듭짓고자 합니다. 제 존재를 적어 내린 스물다섯 장의 편지는,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나요?

 

 

. 화면이 꺼졌다. 조명 역시 꺼지고 말았다. 스태프들과 작가들은 황급히 페르네를 데리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조명이 다시 켜졌을 때는 사회자 혼자만이 강단 위에 서 있었다. 강연에 대한 착오가 생겨 조율을 진행하고 있사오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식은땀은 관객석 맨 끝에서도 보일 정도로 선명했지만, 누구도 사회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뒤. 다시 무대 위로 페르네가 올라왔다. 여러분들은 슬럼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나요? 대분과 같은 시작이었다. 태연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은, 어딘가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페르네는 이제 휴식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었다. 슬럼프가 겹쳐져 우울해졌다는 것을 시작으로,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어떤 날을 지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네는 단 한 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았다. 애초부터 짜고 치는 거짓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분명히, 이 거짓말에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겠지. 충고로 들어 걸음을 고치는 이들도 있을 것이었다. 페르네라면 충분히 그러한 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을 읊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페르네의 강연은 실패하고 말았다. 관객들은 이미 아까 전 페르네가 한 이야기의 진상을 파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집중하지 않았으며, 핸드폰을 잡고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누구도 듣지 않는 강연을 이어나가면서, 페르네는 한 치의 후회도 깃들지 않은 표정으로 예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로 이 강연은, 페르네에게만 만족스러운 강연이 되었다. 의미를 잃은 말이 이어지고, 15분이 흐르자. 페르네는 감사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웅성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실패한 강연이 끝나고, 페르네는 출판사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너무 붐벼, 페르네가 타고 온 차를 탈 수 없었던 게 이유였다. 연예인도 아닌데, 차를 몰기 힘들 정도의 인기라니. 페르네는 시시하다는 생각을 일순 가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페르네는 사랑받고 싶었지, 인기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글을 적은 이유도 단순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흘러넘치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페르네의 잡념은 한 사람의 접근으로 끊어진다. 기자였다.

 

페르네는 기자를 곁눈질로 돌아봤다. 무시하고 떠나려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페르네에게 접근했다. 그는 녹음기를 들이밀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않았다. 페르세포네 씨, 강연 당시 한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페르네는 자신을 응시하는 저 탐욕스러운 눈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특종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자는 무모하고 미련하다. 그래, 꼭 우리처럼. 하지만 동시에 불쾌했다. 감히 저따위의 탐욕과 우리의 욕망을 동일한 선상에 놓으려 들다니. 인간의 감정은 미묘했다. 그래서 페르네는 입을 쉬이 열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대했던 마음은 풍선이 터지듯 금세 녹아 없어졌다. 그래서 페르네는 양 갈래를 고정하고 있던 석류꽃 머리끈을 살살 풀어냈다.

 

99일에, 꿈을 꿨습니다. 페르세포네는 작게 중얼거렸다.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는 모습은 기자도 기대한바 아니었는지 조금 놀란 모습이었다. 이데아에 관한 꿈이었어요. 하지만 기자는 평생 페르네의 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춤을 췄어요. 참 아름다웠죠. 이데아의 중심에서 우리는 꺼지지 않을 영원의 레퀴엠을 불렀어요. 울면서, 웃으면서. 우리는 구더기가 들끓는 라벤더 꽃밭에 누워 잠에 들었죠. 붉은 파도가 우리를 끌어안아 추위를 망각했고요. 하얀 하늘이 잿더미처럼 산산이 조각나 무너질 때에 녹음에 가려진 그들이 검은색 피를 토해냈어요. 우리는 엉망진창이 되어 웃음을 터트렸죠. 흐르는 눈물은 차가웠어요. 그래서 우린 행복했답니다. 정말로, 행복했어요.

 

 

기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페르네는 기대도 하지 않았거니와, 이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허공으로 미묘하게 빗겨나간 시선엔 초점이 맞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기로 했는데. 아주 오랫동안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영원을 공유하고 사랑을 논하기로 했는데. 이상하죠. 우리는 신화가 되지 못했고, 완전해지지 못했어요. 이레 동안 지켜봤던 나날에 이례는 일어나지 않더군요. 역사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한 우리는, 우울을 논하는 대신 서로의 마음에 사라지지 않을 흉터처럼 이름을 박아넣었어요. 아주 깊게 새겨넣어 삶을 달리해도 지워지지 않을 영혼의 글자였죠. 저는 그것을 아주 사랑해요.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괴로울 정도로, 죽어버릴 정도로 사랑해요. 그래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요. 도저히, 영원히.

 

 

페르네가 입을 다물었다. 기자는 침을 삼켰다. 그런 기자를 무시하고, 차의 문을 열며 몸을 돌렸다. , 잠시만요! 기자가 페르네를 붙잡고자 했지만, 애석하게도 기자는 페르네를 붙잡지 못했다. 당연히, 페르네는 그에게 잡혀줄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네는 차의 문을 매정하게 닫았다. 기자가 멍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볼 때, 페르네는 아주 느린 속도로 차의 창문을 내려 열었다. 기자와 페르네의 거리는 멀지 않아, 페르네는 마음 놓고 목소리를 죽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처럼 속삭이는 소리였다.

 

당신들의 페르네가, 에트르의 이름을 되찾았어요.

스물다섯 장의 편지를 갖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나를 만나러 와요.

 

다음 날. 페르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은 SNS와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에 맞춰 페르세포네의 SNS 계정 이름은 어느새 페르네 에트르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뿐, 별다른 해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56, 신간을 출간했을 뿐이었다. 45일에 출간한 책은 존재에 대한 의문과 사랑, 그리고 가족에 대한 미련이 뚝뚝 담겨 흐르는 책이었다. 그러나 56. 모든 논란 속에서 펼쳐진 책의 내용은, 남겨진 사람들의 고뇌와 후회,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존재가 지워진 사람들을 끝없이 추모함으로 존재를 몇 번이고 덧그린, 생존자들의 이야기.

 

 

 

그 책의 제목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