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 바닐레아가 히어로 기관의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25세 전으로는 정기적으로 후원자들과 고위 정치인들을 불러놓고 앞으로의 대한 논의하는, 정부가 주최하는 ‘회의’를 제외하곤 코레 바닐레아가 바깥 활동을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히어로 기관이 그렇게 타인을 쉽게 받아주는 곳이냐, 라는 질문엔 언제나 NO. 라는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즉, 코레 바닐레아가 ‘작정하고’ 히어로 기관에 드나들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코레 바닐레아는 ‘왜’ 히어로 기관에 드나들고 있는가? 작정하고, 그 안으로 침투해가고 있는가? 자신의 권력과 재물, 영향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며 거절할 수 없는 걸음을 여러 차례 행하고 있는가? 몇몇 히어로들은 그런 의문을 품겠지만, 감히 코레 바닐레아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바닐레아 가문의 외동딸, 히어로가 아닌 외부인, 거액의 후원자라는 코레 바닐레아의 성질은 히어로들의 거리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왜 자꾸 오는 거지.”
물론 예외는 존재했다.
코레 바닐레아에게 말을 거는 히어로는 한정되어 있고, 손에 꼽아 있었다. 그마저도 무언가의 보고나 안내가 아니라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 침묵을 즐겼다. 만족스러웠다. 히어로는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전생의 페르네 에트르가 그들을 적으로 규명한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코레 바닐레아는 양산을 살짝 들어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페르네 에트르와 코레 바닐레아가 닮은 점 중 하나로는 자그마한 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참 양산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던 코레 바닐레아의 머리 위로 무거운 한숨이 내려오고, 데릭이 허리를 숙여 코레 바닐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왜 자꾸 오냐 물었다만.”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네요.”
“딱히….”
그렇게 치면 훈련 시간에 쳐들어온 그쪽도 무례하지 않나, 라는 시선을 쉽게 읽어 내렸다. 확실히, 훈련 시간에 훈련장 근처를 구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상도덕이 아니긴 하겠지. 그렇다고 그걸 직접 말하여 물어보다니. 과연 데릭, 이라는 건가. 무미건조한 감상을 가볍게 남기며, 코레 바닐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태연한 태도에, 데릭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것을 모르는 척, 발걸음을 돌리고자 했으나, 뒤에 따라붙는 시선을 외면하진 못했다. 히어로 데릭은 코레 바닐레아가 이 곳에 온 이후로부터 노골적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계인지 감시인지, 아니면 불만족인지는 코레 바닐레아가 알 턱이 없었다.
“길을 잃어서 와버렸어요.”
“지난번에도 그런 이유를 대지 않았나?”
“길을 또 잃었네요. 어머, 나도 참 덜렁이라니까.”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이 느껴진다. 코레 바닐레아는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사실 조금 긴장했다. 데릭의 반응은 잘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것 같고, 침착한 것도 같다. 그렇다고 충동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그가 벌컥 화를 낼 지도 모르고, 그가 나를 확실하게 제거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과 생각이 고요하게 흘러갈 뿐이어서, 내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보다는 나은 상황이겠지만, 페르네 에트르였던 시간이 나를 자꾸만 긴장하게 만드는 걸 어떡하느냔 말인가?
코레 바닐레아가 양산을 꼭 잡아 쥘 때. 데릭은 곁눈질로 코레 바닐레아를 흘겨본다.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릭의 나이에 코레 바닐레아 또래가 어리게 보이지 않을 리 없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어린 티가 난다는 생각을 가졌다. 긴장한 것이 눈에 보이고, 데릭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얼핏 느껴지고 있었다. 코레 바닐레아가 치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많은 히어로들을 양성해낸 교관의 눈은 무시할 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데릭은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였다. 코레 바닐레아가 그것을 눈치 챘을까. 분명한 것은, 힘이 들어가 있던 코레 바닐레아의 어깨에서 점점 힘이 풀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코레 바닐레아는 그것이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데릭은 히어로였다. 나를 죽이고, 내 가족들을 죽이는 것에 동조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원망할 수 있었다. 그 뿐일까. 니샤의 경우, 페르네에게 ‘다정했다.’라는 변명거리라도 있지, 페르네에게 데릭은 그냥 ‘무서운 히어로.’, ‘최악의 히어로.’ 정도로 규정되는 존재였기 때문에. 데릭이 코레 바닐레아를 배려한다는 건 그를 원망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가 다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빌런인 우리를 존중하는 것처럼 예의있게 굴어주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페르네 에트르는 그를 원망해야 했다. 그리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훈련장을 둥글게 뛰어다니는 히어로들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가. 거창하게 무언가를 뜻하진 않았지만, 이 침묵은 코레 바닐레아에게 ‘데릭은 변하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쥐어주었다. 니샤는 만나자마자 그가 나이를 먹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데릭은 별로 나이를 먹었음이 느껴지지 않아, 인간이 맞을까, 라는 의미 없는 고민을 짧게 가질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그는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히어로로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입을 열었다
“데릭 씨는 빌런들과 싸우셨다고 했죠.”
“…?”
“빌런들은, 어떤 존재였나요?”
그냥, 묻고 싶었다. 어떠한 답을 듣는다고 해서 데릭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지금의 대답은 그가 그 시절에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히어로였고, 우리를 죽인 사람들 중 한 명이었죠. 내 동생들은 당신에게 아주 많이 맞고 왔는데 말이에요. 저도 당신으로 인해 벽에 박힐 뻔도 했고요. 분명 대단히 별로인 대답을 하시겠죠. 히어로니까요. 당신은 가장 앞장서서 히어로들의 방패가 되어주었고, 기꺼이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를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사람이라기엔 너무 비대한 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보세요. 지금도 절 내려다보고 계시잖아요. 분명, ‘최악’이라거나 ‘죽어 마땅한 것’ 따위의 대답을….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생각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눈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데릭의 얼굴이 보였다. 그 눈은 어딘가 복잡하기도 했고, 슬픈 것을 펼쳐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빌런을 동정했을까. 아니면 안타깝게 여겼을까. 빌런을 처단하는 게 정의고, 그것이 명령이라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데릭은 보통의 사람이었다. 히어로이기 이전에, 사람의 규격을 벗어난 이능력자이기 이전에. 평범하게 공감을 할 수 있고, 이해를 할 수 있고, 정의를 따르며 규칙을 준수하는. 보통의 사람.
코레 바닐레아는 그 대답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례가 많았습니다.’라며 허리를 숙여 데릭에게 인사를 건넸다. 양산은 접은 채였다. 데릭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정의를 갖고 싸웠을 뿐이었다. 너무 당연했던 것을 마주한 기분이라, 코레 바닐레아의 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변변찮은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미워 죽겠는데, 원망스러워 마지않는 당신들을 ‘이해하게 된 삶’이 짜증나서 견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그가 ‘히어로 다운 발언’을 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랬을 텐데! 의미없는 원망이 허공으로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데릭은 급하게 떠나는 코레 바닐레아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울 것 같은 표정’이 과거, 폐허에서 있던 망상가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아샤 에트르의 경우. (0) | 2021.05.03 |
---|---|
6. 베로나의 경우. (0) | 2021.05.02 |
4. 리오나 A. 에트르의 경우. (0) | 2021.04.30 |
3. 레비아탄 데카라비아의 경우. (0) | 2021.04.29 |
2. 니샤 나탈리아의 경우. (0) | 2021.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