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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문에 대하여

- 네가 ■■■■의 영혼이구나.

 

뭐?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름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고대어에 대해 공부하긴 했습니다만, 이런 저도 못 알아들을 정도의 고대어라면 대체 무슨 언어인 겁니까? 빈정거림을 한 껏 가슴 안에 누르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의 이름은?

- 세례명이요, 본명이요?

- 본명이지!

- 그럼 라피스.

 

성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예전부터 그 보석을 참 좋아했지. 나는 고아라서, 보석을 지녀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삐죽, 입술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자. 성녀는 자신의 턱을 쓸어내렸다. 그렇구나.

 

- 많이들 바뀌었어….

 

작은 신앙의 문에 갇혀 있던 세월이 있다. 그것이 정의고 옳음이라 판단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며 각오와 신념이 무뎌진 탓에, 많은 고통과 댓가를 치뤄야 했다만. 그 당시에는 그 수 밖에 없었다.

 

- 다른 이들은 어떻게 지내나?

- 누구요?

- ■■■이라거나, ■■■■라거나….

- 누구예요, 그건.

- 어허! 이런 역사를 가르치지 않다니. 게헨나도 말세구나….

- 고대 기록 다 사라졌다니까요.

- 그러면 그 아이에 대해서도 모르니?

- 들어나 보죠.

- 황녀의 그림자.

- 느에?

 

게헨나도 말세로구나! 성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라피스는 그게 내심 분한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꾹 눈을 감았다. 황녀? 황녀, 라면….

 

- 혹시 루치아 황녀?

- 오. 아주 말세는 아닌가봐.

- 근데 루치아는 그림자가 아니잖니. 내가 묻는 건 루치아 황녀의 그림자란다.

- 그런 건 진짜 죄송하지만 고대의 고대의 고대의 최종 역사서에도 안 적혀 있어요.

- 역시 그런가~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면 모를 만도 하겠네~

- 알면서 물어본 겁니까?

- 그러면 글러먹은 역사 지식을 가진 게헨나의 아이, ■■■■의 영혼에게 내 한 수 알려주지.

- 아니 기록이 없다고요

- 옛날옛날에~

- 기록이 없었다고

 

- 그 시절에는 삿된 것들도 모두 신으로 살아가고 있었지. 신앙이 넘쳐나고, 신앙으로 굴러가는 세계였어. 하지만 그 중 가장 강력한 권능을 가진 건 태양이었다. 제국의 국교가 태양이었거든. 하여, 태양은 제국을 아낌없이 사랑했지. 그 사랑 중 가장 강력한 상징이 무엇이냐 하면, 대리인이었다.

황실은, 황권을 강화시킬 의무가 있어. 그걸 위해 어떤 쇼를 벌여야 하기도 했지. 태양은 거기에 협조를 한 거야. 황제의 자손들 중 한 명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고, 정해진 날에 기도와 예배를 다하는 것으로 권능을 빌려준 듯한 모습을 비춰주는 것이지.

태양의 비호를 아낌없이 받음을 이 일련의 행사로 보여줌으로, 황실의 권위는 압도적으로 높아지게 된다. 그 높아진 권위로 태양을 각별히 모셔 신앙을 바친다. 그것이 두 존재의 생존 방식이었고, 전략이었지. 모든 황가는 언제나 충실히 이 행사를 따랐어.

사실 태양은 누가 해도 상관없었지만, 황가는 이것을 중요한 의무와 예로 여겼거든. 황제가 되는 것은 재능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이 일은 황제가 낳은 첫 번째 아이가 맡게 되었어. 그게 점점 규율이 되었지….

 

- 굉장히 고리타분하네요.

- 그치? 근데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야. 왜 신앙의 문이 생겨야 했는지. 모든 신이 삿된 것으로 전락해 마물만도 못 해졌는지 알려주마.

- 잠시만요. 잠깐만요. 그게 중요한 이야기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일개 전투수녀예요. 이런 얘기는 저한테 하실 게 아니라, 교황님하고 하시는 게….

- 들어라. 네가 ■■■■인 이상 네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지금 당장 문 밖에 있는 누군가를 불러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미쳐가는 건지, 성녀님이 오락가락하는 건지. 그러나 몸은 납이 된 것처럼 무거웠고, 나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성녀는 자신의 금발을 살살 뒤로 넘기더니, 곧 눈을 내리 깔았다.

 

- 제국의 19대 황제 ■■는 28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자식을 봤어. 황후 ■■■■■이 낳은 아이였기에, 혈통을 의심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어. 황제와 황후의 금슬은 좋았고, 두 사람 모두 성군이라 지칭될 만한 이들이었기에 첫 째 황녀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걸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어.

- …그 황녀가….

- 그래. 태양의 대리인, 성녀 루치아다.

 

 

(날려먹어서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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