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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침몰.

 

 

 

사람들이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있다. 맨 뒤에서 특기를 쓰는 이들은 나약할 것이라는 편견. 생각 많은 놈은 오는 칼도 못 피할 거라는 편견. 지휘관은 약하다? 요약하자면 그런 착각들 말이다. 음, 이유는 모르겠다. 왜 그런 이미지가 생겨난 걸까? 애당초 가수라는 이미지 때문에 유독 나를 만만하게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좀 비실비실해보이긴 한가 보지. 통찰력이 나쁘진 않는구나, 싶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들의 편견이 어느정도 들어맞을 때가 있다. 사람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면 사실 특기의 힘을 거의 받지 못한다. 누구나 특기의 힘을 빌리며 살아가는 건 아니라지만, 나는 대치 상태가 아니면 쓸모없는 특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 중에서 허약하다, 혹은 약하다, 정도의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상황을 늘 생각해왔다. 갑자기, 괴한이, 칼을 들고 덤벼드는 생각 따위 말이다. 해서, 나는 나를 어떻게 이용해야 이길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랄까, 이건 꼭 생각하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좁혀지는 거리에서, 내 특기를 이길만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누구나 숨을 뺏기면 당혹스러워하는 법인지라. 누군가는 비명 소리에 덜컥 놀라 주변을 살폈을 수 있겠으나 금세 호기심을 접어둘 것이다. 나는 상대방이 떨어트린 식칼을 들고 날을 살폈다. 예리한 것이, 숫돌로 갈았나 보다. 진짜 나를 찔러 죽이려고 한 걸까? 컥컥거리는 상대방의 후드를 잡아 재끼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나를 반긴다. 아, 얘 걔잖아. 자퇴했던 걔.

 

나는 칼을 저 멀리로 집어 던졌다. 날고 기어 다니는 애가 와도 잡지 못할 곳에 칼이 툭 떨어졌다. 이크, 바닥에 흠집 안 나려나 모르겠네. 음, 오늘은 혼자 귀가하길 잘했다. 매니저 오빠나 실장님이 있었다면, 둘 중 누가 다쳤을지 모를 일이니까. 근데 이건 무슨 일인가? 뒤늦게 상황을 살피자, 익숙한 얼굴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죽어버리지 그랬어!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었으면 아마 19살 때 이미 죽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그전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절망에 휘청거리면서, 연약한 마음을 끌어안고…. 음, 이 생각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 우울해지니까. 나는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는 범죄자와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가까이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굉장한 위험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느껴본 적이 없다. 숨을 쉬지 않는 자, 호흡의 소중함을 알면. 나의 심해에 처박혀서 죽어가기 마련이니까. 물론, 나는 그 지경까지 특기를 써본 적이 없다. 지키려는 사람이 어찌 남을 해하겠는가. 불행을 박박 긁어 안은 내가 이해해야지. 

 

… ?

 

중요한 건 달리 있기 때문에, 나는 생각 하나를 차단했다. 하여,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너, 뭐 하니?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숨 쉬기가 불편할 텐데, 버티는 힘이 정신력이라면 그는 대단한 정신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 정신력으로 현실을 좀 보면 어땠을까, 나는 애먼 아쉬움을 삼킨다. 그에게 조언을 한 것은, 그가 너무 비대한 이상을 짊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조언을 요구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런 사람임을 알고서 부탁한 게 아니었는가? 아니면 네 이상을 '현실적인' 범위로 줄여주길 바란 거였나. 근데 난 무리야. 그런 거 못해. 현실을 살아가기도 벅차단 말이야. 그런 이상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좇는 게 한심하고 멍청한 거라고…. 한숨이 절로 나와 머리를 헝클이고 있자니, 그가 입을 연다. 

 

나는 당신이 싫어요.

 

그래, 익히 예상한 말이었다. 눈 빨갛게 물들여 울음 참는 낯으로 도망친 애가 나를 좋아하면, 그건, 음, 얘가 이상한 걸 테니까? 딱히 상처받을 필요 없었다. 이따금 나는 이 아이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 상상 속 이 아이가 뭐라고 말했더라. 이름은, 아, 이름은,        . 랫서 판다 혼혈. 나보다 두 살 어렸던 애. 편의상 나는 그를 C, 라고 지칭했다. C 씨는 사나운 얼굴로 자주 내게 말을 걸었다. 나가 뒈져, 라거나. 죽어버려, 라거나. 응응, 이해해. 나 때문에 자퇴했다면 사과해 마땅한 일이니까. 근데 그게 내 탓이냐? 나를 원망할 수는 있지. C 씨는 다시 입을 연다. 

 

 

 

 

 

나 진짜 죽어라 노력했는데.

나를 지키고, 약속의 책임을 지려고.

이론적으로, 최악을 피하면 사람은 행복해진다.

근데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원래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 간사한 존재다. 여태까지 '괜찮아, 버틸 만 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말 한마디에 맥이 풀려서, 순탄하게 뛰어온 모든 길이 가시밭길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었다. 저 자가 내게 가진 감정. 이건 질투인가? 아니면 혐오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슨 감정인지, 무슨 마음인지. 딱히 예측되지도 않았고,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완전한 적의만 눈동자에 가득 담긴 것이 보여,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C 씨의 말은 정확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특기. 실생활에선 쓸모가 없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안성맞춤이다. 종족. 인간. 말이 필요한가? 이 도시에서 종족이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스승. 1세대 히어로를 스승으로 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계 정상 급 가수를 스승으로 둔 사람은 몇이나 있고? 그 둘에게 한 번에 가르침 받아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등급. A등급. 그것도 '플레이트'가 규정한 등급이 A. 그리고, 재능. 나는 천 년에 한 번 나올만한 목소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노력한 게 없었나.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행복하기만 했나. 여기서 나는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단조로운 행동들. 약간의 보호, 조금의 다정과 자비. 그리하여 이해. 하지만 이 거대한 세상에서 나는 티끌만도 못한 존재니까. 이 단조로운 행동조차 하기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제법 힘냈어.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상당히 애썼어. 내가 짊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게. 굉장히 노력했어.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붓는 것으로. 하지만 제삼자의 눈에는 결국 이렇게 보이는 걸까? 운이 좋아서, 행복해진 사람. 그제야 나는 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최선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 눈에는 운 좋게 모든 것을 쟁취한 어린애가 고집부리는 꼴로 보였구나. 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 예상했어.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에 상처받아서 상처받을 이유가….

 

……?

 

아니, 그런 생각은 그만하자. 그보다, 이게 내 잘못인가? 나는 여전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이 좋은 것도 재능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나. 애당초, 비대한 이상을 끌어안고 익사하는 게 정말로 옳은가? 하지만 그 이상 때문에 피해본 사람이 몇인데.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기사의 첫 문단을 떠올린다. 그 선배. 자살했댔지. 우리들이 그에게 끼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우리들의 탓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힘이 없고, 대책이 없는데 덤벼드는 건 멍청한 짓이다. 현실과 타협해야지. 머리에 든 게 없이 한심해 보이는 공주님의 말이라도, 현실적으로 합리적이라면 들어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래. 불가능한 것을 꿈꾸지 말고. 행복을 기대하다 상처받느니 그냥 불행하게 사는 게….

 

………? 

 

생각이 자꾸만 끊긴다.

응? 이 생각이 맞나?

이게 아닌 것 같아.

근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자, 그러면 다른 생각을 하자. 그의 처분은 어떻게 할까. 이런 순간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봤자. 음, 이건 살해미수로 넘겨야겠지. 현행범이니까, 무기도 있으니까. 사건은 술술 풀릴 것이다. 조용히 은밀하게 처리하면 기사는 막을 수 있을까? 일단 실장님께 연락을 드려야지. 매니저 오빠한테도 얘기는 드려야 하고. 아, 뉴스 속보로 나가는 것만큼은 사양인데. 애들이 걱정하잖아. 걱정 끼치지 말아야지. 안그래도일이많은아이들이야내소식때문에걱정이라도끼치게되면애들낯을어떻게봐이제나컴백이코앞인데이런구설수에오르면안그래도시기가흉흉한데감히인간을습격하려했느냐며혼혈하고영물에대한공격이심해질거란말이야일반인이었어도일이커질일인데지금내위치를생각하고칼을들이민거야?할거였으면날완전히죽일생각으로했어야지이렇게어중간하게구니까제압당해서결국엔내가고민을해야하잖아완전범죄로죽이면또몰라요만약죽이고나서덜미잡히면어쩌려고그래너네들지금사회적약자야그냥숨만쉬어도인간들이너네싫어해내가그꼴보기싫어서얼마나웃고사방팔방으로뛰어다녔는데네가어떻게이럴수있어물론나같은게애써봤자티끌만한도움이되기나했을까싶지만그보다이런일실장님이알면당장경호원붙여주실텐데저번에도정신병원얘기하셨는데이번에도이핑계로정신병원을권유하면어떡하지그런거다닐시간없다니까?이런순간에대해내가몇번을생각했는데자꾸이상한말을해서생각을끊어나도진짜답이없다이런식으로굴거면그냥칼맞고좋게좋게끝나도되지않았을까대충급소만피해서맞으면쟤도만족나도안심나는그냥정체불명의괴한에게당했다고하면되잖아그래상대방은질투에미친인간!노래부르는건복부랑목만있으면충분해너덜너덜해져도소리내는거엔문제가없다더라근데만약다쳤으면떠들썩해졌겠지그러면그땐진통제를먹고버티면되니까실장님하고오빠한테양해조금만구해야지근데나지금안다쳤잖아그러면이건어떻게해결해야해아생각해보니까그냥묻어두면된다나만조금참으면되잖아?그래괜찮아요늘하던거잖아요상냥하게상대를침몰시킵시다이해해해줍시다그리고다정과자비를한가득긁어모아내뱉습니다나는너를용서하노라이모든죄를사하고더나은선택을제시하기위해네가가진모든상황의부정을가정하고손을잡아줄게침몰을너무두려워하지마가라앉는건외로우니까혼자두지않을게그러면적어도

 

최악은 면할 수 있겠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C 씨를 그냥 보내주었다. 어차피 다친 곳도 없었고. 미수에 그쳤고. 여긴 CCTV도 없었으며, 나도 쟤를 자퇴시킨 전적 그러니까그게왜내탓이야쟤가내말을귓등으로안쳐듣고아등바등애쓰다가몰락한건데. 이 있으니까. 서로서로 용서했다고 여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얼굴을 싹싹 쓸어내렸고.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위험했기 때문에? 아니, 그건 딱히 아니었다. 나는 돌연 내가 숨을 쉬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침몰은 언제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고, 수면 위에 떠오른 모든 것을 가라앉게끔 만들기 때문에. 그래, 필연적으로 나 역시 침몰하게 되곤 한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나의 심해니까. 나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니까. 하지만 딱히 아니었나 보다. 이건 예상외의 범위였다. 

 

 

그래서 나는 기나긴 생각에 마침표를 찍는다.

나 하나도 안 행복하구나. 근데 왜 이렇게 살지? 그래도 스케줄은 줄이지 않기로 했다. 할 일 많아. 그런 거 생각할 시간 없어. 애당초 시간이 남아봤자 너네들 다 바쁘잖아. 연락도 없거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좀 가르쳐주지. 너네 없으면 인간관계 0%인 사람은 할 것도 없으니까. 아, 문자나 좀 더 왔으면 좋겠다. 만나자는 얘기는 기대하면 안 되는 걸까. 근데 진짜 왜 이렇게 연락 안 되는 애들이 점점 늘어? 설마혹시죽어버린건아닐까사고에휘말린건아닐까그게아니라면뭔가도움이필요한건아닐까이만큼자랐으면도움을요청해도되긴하는데혼자미련하게짊어지고애쓰는건아니겠지무리하는거면어떡해그런경우라면내가뭘할수있지너네들을위해서내가

 

 

 

타임.

…오늘은 일찍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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