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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망상의 연장선.

 

 

 어느 날, 나의 시야에는 거대한 암굴과도 같은 구멍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깊고 어두운 구멍이었다. 장소와 상황에 맞지 않게 이따금 뻥 뚫려있곤 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아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얼룩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구멍이었고, 손톱만 한 크기의 그것은 분명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곳에 구멍이 뚫려있을 리 없는데, 싶어 한참을 지켜봤지만. 그것은 아주 깊고 어두운 암굴과 비슷했다는 사실 외의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만 끝났으면 관심도 끝났을 터인데, 이제와 이 구멍을 지켜보는 이유는. 구멍이 점점 커져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손톱만했다. 시간이 지나니 손바닥만 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니 그것은 사람 하나를 거뜬히 잡아먹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그때 즈음부터 구멍의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혼란을 삼켰다. 바람도 불지 않는 구멍은 왜 자꾸 생겨나고, 커져가고, 늘어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워져서 가족들의 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있죠, 저기에 구멍이 있어요. 하지만 … 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페르네, 구멍이 어디 있니?

 

 그래서 나는 저 구멍이 신경쓰였다. '나'에게만 보이는 구멍이기 때문이었다. 저것보다 더 기괴한 것들을 많이 봐왔는데, 어째서 이리 소름 끼치고 불쾌한 걸까.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나의 망상이라는 것인데, 내가 언제 저런 구멍을 망상으로 그려내고자 했지? 나는 불편한 심기를 거두지 못하며 구멍을 노려봤다. 정확하게는, 앞에 앉은 …를 바라본 것이었지만. 그 커다란 구멍이 … 의 얼굴에 생겼기 때문에 나는 구멍을 노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의 너머를 한참이고 지켜보고, 한숨이 새어 나올 무렵. 나는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꿈을 꾼다. 허무할 정도로 장렬하게. 비참할 정도로 거대하게. 하지만 그 모든 망상은 '나'의 의지대로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미쳐간다 해도. 사랑하는 내 가족의 얼굴을 보기 싫어할 리가…….

 

 뚝. 이성의 끈이 반 쯤 끊어졌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두렵다고 여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만 보이는 구멍은 나의 '망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두려워졌다. 명계의 까마귀가 귓가에 속삭인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나도 백 번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 내 이름을 불렀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턱 막혔다.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나는 발을 질질 끌어 몸을 돌렸다. 달렸다. 구멍이 너무 많아서 괴로웠다. 그것은 끝이 없이 이어진 듯한 통로를 닮아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불지 않았으며, 어쩔 때에는 불쾌한 시선마저 느껴지곤 했다. 

 

 저건, 대체 무엇이지? 

 

 나는 두려움을 등에 업고 한참을 달렸다. 통제되지 않는 망상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 어째서인지 이 구멍은 바라고 바래도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헛숨을 들이켜고 토해내며 내 망상을 덧그렸다. 쉽게 그려진 진홍빛 하늘 사이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이건 내 망상이 아니었다. 나는 한참을 달리다, 이젠 빌런 기지를 거의 다 잡아먹은 구멍의 앞에 도착했다. 나는 그때쯤부터 나의 표정을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그리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리하여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내 가족들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어, 지면에 몸을 숙였다.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자, 머리카락이 구멍에 빨려 들어가듯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구멍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붉은색 눈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눈이었다. 시선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숨을 참았다.

 

 뭐야, 살아있네. 재미없게.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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