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16. 미스티 에트르의 경우.

Queen  2021. 5. 11. 17:12

 코빈 재스퍼는 훌쩍이면서 코를 닦았다. 코피가 영 멎지 않아,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두들겨 맞았는지, 코빈 재스퍼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니려나, 대련이라곤 했지만, 봐주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데릭 교관님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코빈 재스퍼가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코 밑을 비볐다. 소매로 꾹 누르기엔 겉옷이 너무 새하얀 탓에, 이미 빈 곳 없는 휴지만 애석하게 너덜너덜해질 뿐이었다.

 

 결국 코빈 재스퍼는 진정하고 와라.’라는 외마디의 말을 지키기 위해서 나 홀로 휴게실에 도착했다. 어쩐지 땡땡이를 치는 느낌, 같기도 하지만. , 겸사겸사 이참에 푹 쉬는 거로 코피가 멎으면 그쪽이 이득이니까. 남들이 보면 합리화에 불과할 것 같지만, 어쨌거나 코빈 재스퍼가 잘못한 건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일 것이다.

 

 코빈 재스퍼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코피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코를 휴지로 툭툭 두드렸다. 역시 훈련 시간의 휴식만큼 달콤한 게 또 없다. 휴게실 창문으로 얼핏 보이는 히어로들은 교관님의 엄격한 감시하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흙먼지가 발목을 감싸는 것을 보면서 힘들겠네.’라는 가벼운 생각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참, 창문을 바라봤을까. 휴게실의 문이 열렸다. 코빈 재스퍼는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할 법도 하건만, 고개를 돌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것은 휴게실 안쪽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코빈 재스퍼의 뒤쪽에 자리 잡았다.

 

 코빈 재스퍼는 히어로였다. 비록 현장 투입보단 훈련을 받는, 아직 미숙한 미성년이었지만. 그럼에도 이능력을 갖고 있었고,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사례를 공부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코빈 재스퍼는 조금의 경계심이나 불안함, 호기심을 가질 수 없었다. 갖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버린 코빈 재스퍼는 그의 머리끈을 풀어 내리며, 빗을 드는 손길을 저지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채였다.

 

 

 “아프진 않았어요?”

 “, 별로 아프진 않았어요. 고작해야 코피였는걸.”

 

 

 다행이에요. 그 사람은 느리게 웃음을 터트렸다. 코빈 재스퍼는 맞은 게 상당히 분했다. 아프기도 아팠고, 무척 짜증스럽기도 했다. 어른스럽게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상대방의 얼굴에 주먹 한 번 먹이지 못한 게 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저 다정한 목소리에 차마 아니! 장난 아니게 아파!’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강한 척을 했다. 그 사람이 기억하는 자신은 그럴 것 같다, 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어디서 기인된 것인가? 코빈 재스퍼는 답을 찾지 못했다.

 

 상냥한 손길이 이어진다. 코빈 재스퍼의 머리카락을 살살 빗겨주는 손가락은, 코빈 재스퍼가 금방이라도 부서질까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코빈 재스퍼는 너무 살살 건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지며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그 사람이 이야기했다. 머리카락, 많이 길었네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했고, 어디선가 잡아본 손 같기도 했다. 그리운 것 같기도 했지만, 낯선 것 같기도 했다. 사랑받는 건 낯선 일이 아님에도 코빈 재스퍼는 어디서였을까.’, ‘언제였을까.’ 따위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또 웃었다.

 

 창문 바깥에서 노을빛이 들이차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햇빛에 의해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늘어지고 말았다. 하나는 앉아있는 코빈 재스퍼의 것이었지만, 그 뒤에 서 있는 그림자는 작은 여성의 그림자였다. 곁눈질로 그것을 살짝 돌아본 코빈 재스퍼는 어째서인지 안심을 해버리고 말았다. 경계해 마땅한 상황임에도, 코빈 재스퍼는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간이었고, 따듯한 나날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어냈다. 긴장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코빈 재스퍼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는데, 별로 대답할 것이 없어 곤란해졌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니.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로 허둥지둥 등교하고, 학교가 끝나면 급하게 기관으로 돌아온다. 교관님의 훈련은 여전히 힘들었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면 사랑스러운 동생들이 반겨준다. 고된 나날이지만 즐거웠다면 즐거웠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버거웠다. 말이 잘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 사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코빈 재스퍼의 머리카락을 살살 모으기 시작했다.

 

 

 “바빠 보이던데. 힘들진 않아요?”

 “힘들지만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주 못 버틸 정도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줄 알았는데, 이젠 다 컸네요.”

 “누나가 날 너무 어린애로 보는 게 아닐까요.”

 

 

 누나? 코빈 재스퍼가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나온 호칭에 코빈 재스퍼는 잠시 숨을 참았다. 누나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딱히 없었는데. 뒤늦게 위화감이 들어, 코빈 재스퍼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동생들은 사랑스럽지만 애석하게도 코빈 재스퍼의 손위 형제는 없었다. 기관과 학교에서도 누나보다는 선배후배로 호칭을 정했다. 그런데 누나, 라니? 코빈 재스퍼의 고민이 이어지던 중, 한데 모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묶기 시작한 그 사람은, 느긋한 시선으로 코빈 재스퍼를 내려다봤다. 그래봤자 뒷모습이었지만, 그 사람은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코빈 재스퍼가 느낀 시선은 그런 것이었다.

 

 

 “누나는어떻게 지내요?”

 

 

 꿀꺽. 코빈 재스퍼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일렁이고, 그 사람은 다 묶었다는 듯 잔머리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코피는 멎었는데, 피 냄새가 뒤늦게 몰려왔다. 그 사람은 한참이고 대답하지 않아, 다정하기 그지없던 노을빛이 조금 뜨겁다고 느껴졌다. 코빈 재스퍼는 뒤늦게 의자를 손으로 짚고, 삐걱거릴 것 같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곁눈질로 바라보는 그림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코빈 재스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그 사람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코빈 재스퍼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나 비통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우울해지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코빈 재스퍼는 알고 있었다. 사랑받는 사람은, 그것을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빈 재스퍼는 돌아가지 않는, 그리고 돌려서는 안 될 것 같았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돌렸다. 삐걱거리는 것이, 꼭 허락받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코빈 재스퍼가 시선을 겨우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본다.

 

 

 “거짓말이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아니, 왜 그것을 확신했는지. 코빈 재스퍼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어딘가 안도한 것 같기도 한 옅은 색 붉음을 한없이 바라봤다. 그 안에 깃든 모든 것이 해일처럼 일렁여서, 멀미가 날 정도로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웃었다. 그러나 일그러진 미소여서, 그다지 예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머리 한구석을 잡아먹은 그리움이 눈물처럼 가슴에 뚝뚝 고이기 시작했다. 코빈 재스퍼의 하늘빛 눈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것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그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 핀을 꽂아주었다.

 

 

 “누나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그게 비록 잔존하는 세계의 오류로 인한 설정이라 하더라도 나는 기뻤어.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면. 진작 시도해볼걸. 현실도, 망상도, 전부 비틀어버릴걸. 나는 참 미련해. 한심하고, 안타까운 존재야. 그래도 말이야, 네가 행복해 보여서. , 정말 기뻐. 정말로, 기뻐요.

 

 그 말은 아득히 먼 곳에 잠겨있는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코빈 재스퍼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꺼내기 위해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형체를 잃어버린 단어가 조각나 문장을 만든다. 간절하게 전해야 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러나 코빈 재스퍼가 그 말의 형체를 다잡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몰아치는 노을빛 바람에, 눈을 꾹 감았다 뜨니. 더 이상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코빈 재스퍼만이 그곳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그 사람은 누구였지. 로 허공을 응시한 코빈 재스퍼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앞머리를 넘겨 꽂은 핀을 빼냈다. 코빈 재스퍼가 입사한 이후로, 히어로 기관에 그런 색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쩐지 오른쪽 눈이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까맣게 점멸해버리고 말았다. 아프진 않았다. 아프다기 보단, 울렁거리는 뭔가가 눈 하나를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짜리 시야로,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딸기모양의 핀이 손에 남아 있었다. 그 사람처럼 사라져버리지 않고, 형체를 남겨 존재하고 있었다. 코빈 재스퍼는 딸기는 좋아한다. 그러나 핀으로 꽂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기쁠까, 왜 슬플까? 그것을 한참이고 바라보던 코빈 재스퍼는, 핀의 뒤편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의 끝으로 그것을 더듬어 읽어보면, 자그마한 핀답게 새겨진 각인 역시 간단했다.

 

 ‘안녕.’

 작별의 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