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이케르 하워드의 경우.
단단하게 닫혔던 문이 열린다. 집 안으로 들어온 이케르 하워드는 더듬거리며 벽을 짚는다. 온몸이 피곤하고 고단했다. 누군가가 도망쳤다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으니 원. 추적도 무리, 생포도 무리. 이래저래 고생만 한 날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뭔지, 얼굴이 어떤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피로에 찌들어버린 한숨을 느리게 내뱉고, 벽 위에 올라간 손가락이 살금살금 기어 버튼을 찾는다. 깜깜한 방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케르 하워드는 불을 켜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땅으로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윽,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습이었다. 문이 열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 이케르 하워드의 어깨를 누군가가 짓밟는다. 부츠의 굽처럼 느껴지는 것은 날카롭진 않지만 둔탁한 고통을 주기엔 충분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케르 하워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접촉’이 행해진다면 무언가를 읽을 수 있기 마련인데,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이케르 하워드의 것이기도 했고, 상대방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딘가 짐승의 소리처럼 들려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반쯤 잠긴 시야에 들어오는 창문 너머로는 조금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 사람의 소리라거나, 이데아의 황금빛 야경 따윈 존재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기이했다. 불쾌할 정도로 깜깜한 어둠에 갇혀버린 기분이라서.
“이케르 하워드.”
그것은 제법 얇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짐승의 숨결이 섞인 것 치곤, 많이 쳐야 20대 중반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이케르 하워드는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떠올라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빛바랜 기억 속 목소리는 언제나 과장되어있기 마련이라, 이케르 하워드의 기억은 결국 지금과 맞물릴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과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고,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나는 지금부터 세 가지의 질문을 할 거야. 그러니 너는 세 가지의 답을 늘어놔야 해. 너는 그래야만 해.”
“거, 절한다면 어쩌, 실, 거죠?”
“빌런의 요구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빌런이라고 소개했다. 이데아는 여전히 멸망과 싸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안정된다 해도 재앙은 쏟아지고, 우리들은 하루하루 이데아를 위해 발맞춰 걸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시대였다. 빌런이랄 건 존재하지도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다! 이케르 하워드는 이것이 단순한 강도 사건이나 습격, 암살 따위의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집에 들어온 지 3분도 되지 않은 채였다.
“첫 번째 질문이야.”
“…자세부터 바꾸면,”
“가족을 버리는 방법은 뭐야.”
이케르 하워드는 입을 다물었다. 가족. 그에게는 수많은 가족이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케르 하워드’라는 가짜 이름에 붙어있는 관계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소중하게 여긴 ‘이케르 하워드’라는 이름에 새겨진 것들이었다. 사랑했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 것들이 그 모든 것을 버리게 했지만.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케르 하워드는 입을 다물었다. 가족을 버리는 방법.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마음에서 그들을 버린 적이 없었다. 버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두 번째 질문. 날 사랑해?”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눌린 고개가 돌아가지 않은 탓이었다. 어깨를 밟은 부츠 굽의 강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짐승의 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케르 하워드를 응시하면서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이케르 하워드는 두 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회’를 운운했지만, 이케르 하워드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의, 대답의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의도는 무엇인지, 저 안에 담긴 속뜻은 무엇인지, 정답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걸 저 자가 왜 아는지….
“세 번째 질문. 내가 누구인 것 같아?”
그는 웃은 것 같았다.
이케르 하워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말해야 함을 알았다. 빈틈을 찾으려면 그래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질문 하며, 답을 원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의 ‘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허탈할 정도의 분노를 쏟아낼 곧이 필요했다. 어떠한 명분으로 이케르 하워드에게 이러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건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했다.
“나. 이름을 잃어버렸어”
“당신,”
“더 이상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아. 존재부터 철저하게 부정당한 느낌이야. 나는 어떤 감정을 가졌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을까. 내게 가족이 있었나. 내가 사랑한 것들은 무엇이었지. 있잖아, 로이드. 나는 다시 만나면 널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지. 하지만 다시 만난 지금조차 너에게 기회를 주었고 살생을 범하지 않았어, 왜일 것 같아? 감히 나를 버린 널, 감히 우리를 버린 널! …죽이지 않고, 찾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야.”
“…너,”
“내가 에트르였으니까. 네가 가족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전부 잃어버린다면 나는 널 죽여야 하지 않을까? 그가 속삭였다. 가족이 없어졌어. 전부 사라졌거든. 허상처럼, 모래처럼 흩어지고 말았어. 모래시계 안에 담겨있던 모든 별이 사라졌어. 나는 복수하고 싶어. 쏟아내고 싶어. 가슴을 가득 채운 독과 같은 미련을, 나를 잊었다는 사실에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던 괴로움을. 나 혼자서만 하루하루 버텨나갔던 나날에 대해 소리를 지르고 싶어. 감히 날 배신하다니. 감히 날 버리겠다니.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 그럼에도,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했잖아….
일방적인 독백이 이어진다. 짐승이 목을 긁는 소리를 내는 듯해, 이케르 하워드는 얼핏 숨을 참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얼핏 그려졌지만, 그것의 갈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랏빛 안개를 흩트려 놓은 것 같았다. 쏟아지는 폭우. 흩어지는 핏방울. 허공을 가르는 비명과. 그 가운데에 서 있었던….
“그랬는데. 나, 기다렸는데. 참았는데.”
“……”
“그런 나에게. 나만. 왜. 다들.”
“……”
“이렇게 가혹할 수 있어?”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짐승 같은 목소리가 몰아치는 폭풍에 잠겨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는 뚝뚝 울음을 떨어트렸다. 이케르 하워드의 손등으로 물방울이 맺히고 말았다. 유례없는 소나기의 시작에 이케르 하워드는 당황하면서도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나 거세게 어깨를 짓밟던 굽이 천천히 물러나는 것 같았다. 겨우 자유를 얻어낸 이케르 하워드는 몸을 일으켜, 방금까지 자신을 짓밟았던 이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 형체는 그림자와 같아, 무엇하나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케르 하워드는 뚝뚝 울고 있는 옅은 빛 적안을 바라보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엔 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이케르 하워드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그건 비단 팔이 가늘어서, 근육이 없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어서였다. 그래서 이케르 하워드는 밀려오는 울음소리에 입술을 달싹이지 않았다. 조용한 침묵이 이어지고, 그는 두 걸음 물러났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딸.”
그의 형체가 허물어지듯 녹기 시작했다. 마치 존재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아빠는 딸을 잊지 않았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케르 하워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아주 뒤늦게 자각했다. 딸, 이라거나. 아빠, 라거나. 안개가 걷히고 하나의 이름이 떠올라, 그는 급한 행동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둠에서 건져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도.
이케르 하워드가 걸음을 옮겨 내려다보니, 그가 서있 던 자리에는 축축하게 늘러붙은 핏자국이 바닥에 고여 있을 뿐이었다. 핏방울이 얽히고 섥히며 이야기한다. ‘거짓말쟁이 로이드.’ 그 위로 한 개의 총이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고, 어둠 속 형체를 구별할 수 있을 때에는 이데아의 황금빛 야경 역시 이케르 하워드의 시야에 돌아왔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니. 겨우 찾은 그의 이름을, 이케르 하워드는 또다시 잃어버렸다. 뒤늦게 떠오른 그의 표정은 꼭 죽으려는 사람의 눈을 갖고 있어서, 이케르 하워드는 급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름을 잃기 시작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이케르 하워드는 아주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모든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와 총을 주웠다. 그 안에는 매그넘의 탄환이 들어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총은 매그넘이 아니었다. 그는 로이드를 죽일 수 없었다. 로이드는 아무 말도 꺼내놓지 못한 채, 그 총을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