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7. 아샤 에트르의 경우.

Queen  2021. 5. 3. 13:49

 페르네 에트르는 아샤를 단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샤를 오빠로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페르네가 마음을 열고 우리를 가족이라 지칭하기 시작했을 때, 울음과 숨을 섞어 삼키고 오빠, 라거나 언니, 따위의 호칭을 붙였을 때. 아샤는 쏟아지는 해일 앞에 방패를 고쳐 잡았고, 쓰린 상처를 내어주면서 기꺼이 침몰했다. 그리하여 페르네 에트르가 기억하는 아샤는 언제나 방패를 든 뒷모습이었고, 혹은 피로 범벅을 한 상처투성이 모습으로 남았다.

 

 페르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딘가 미련해.’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그 정도로 고집스러운 뒷모습이었다. 그리하여 페르네 에트르의 기억에는 아샤의 웃는 얼굴보다 그림자가 진 상처투성이의 등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웃는 얼굴로 돌아오지 않고 금속 케이스 하나로 돌아왔으니까. 돌아오면 안아주려고 했는데. 너도 내 오빠로 인정할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는 그 나름의 사상과 신념, 그리고 목표를 갖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지만. 페르네 에트르는 조금도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누군가를 지키는 건 미련하고 한심한 짓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방적인 신뢰는 보답받지 못하고, 보호는 버려질 뿐이다. 당시의 우리는 가족조차도 아니었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가치를 다 하면 남이 되고 말 관계였다.

 

 하지만 아샤는 왜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그것이 궁금하다고 하면, 아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샤는 다정하니까, ‘차근차근 알려줄게요.’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 지도 모르겠다. 코레 바닐레아는 어슴푸레한 달빛으로도 밝히지 못한 방 안의 침대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샤라면 이렇게 해주었겠지, 라며 시작한 행동이었는데. 아샤의 손보다 곱상하고 힘이 없어, 코레 바닐레아는 아샤 에트르가 어떻게 페르네 에트르를 쓰다듬어줄지 감을 잡지 못했다.

 

 결국, 오지 않는 잠을 부르기 위해, 코레 바닐레아는 일탈을 결심했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어두운 밤에 연약한 몸을 이끌고 바깥에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코레 바닐레아의 이데아는 평화롭다지만, 페르네 에트르가 보여준 이데아는 조금도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었다. 얇은 겉옷을 걸치고, 가벼운 신발을 고쳐 신으며. 바닷가의 산책길을 걷던 코레 바닐레아는, 문득 이 바닷가를 걷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낮이 아니라 양산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자를 쓰거나, 핀을 꽂은 것도 아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며 요동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코레 바닐레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기척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야 바깥 어딘가에 누군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코레 바닐레아는 상념을 지웠다. 지워지지 않고 번진 아샤의 얼굴이 감정의 잔해처럼 어렴풋이 남았다.

 

 신발을 끌어 모래 위에 발길을 남는다. 우리는 바다에 오기로 했다. 약속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바다에 오지 못했고, 누구도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정할 때, 아샤는 이미 .침몰하고 있어서. 아샤가 찬성했을지는 모르겠다. 아샤는 물을 좋아할까?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좋아할 수 있었을까? 코레 바닐레아가 한참 신발을 끌고 나니, 바닷가 한 구석의 수면 위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도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달이 동그랗게 뜬 밤, 어두컴컴해서 시리도록 푸른 바닷가에서 만난 것 치곤 낭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도가 들이치는 소리는 몰려 들어오는 발걸음과도 같아,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상대를 가늠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코레 바닐레아는 반 박자 늦게 웃었다. 그러자 한 박자 뒤, 그도 웃었다. 그런 것 치곤 그의 눈은 지독하게 허망해보였지만 말이다.

 

 그는 나를 알까? 코레 바닐레아는 저 얼굴을 안다. 바닐레아 부부는 고위급 정치인이었고, 따라서 그와 연관된 높으신 분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비록 코레 바닐레아는 마주한 적도, 이름조차도 모르지만. 그들의 얼굴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저 자가, 현재 이데아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권력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코레 바닐레아를 주눅 들게 하진 않았지만, 생각을 이어가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다지 뒤가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며, 바닐레아 부부가 알려준 것은 없으니 오늘 일은 우연으로 묻어두자는 생각을 했다. 허망한 눈을 가진 사람과 엮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건 코레 바닐레아가 25년간 거울을 바라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에게 향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고, 코레 바닐레아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어딘가 의아함, 그리고 약간 남아있는 익숙함과 그리움.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의 이유를 찾지 못한 것 같았고, 코레 바닐레아는 그 시선 속에서 이유를 찾아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알던 아샤는 그 어느 순간에도 이런 눈빛을, 그리고 그런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저마다 욕망을 갖고 살아간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더러운 일도 서슴치 않는다. 추악하고 더럽게, 아득바득 살아나가는 것이 인간이며, 그 어떤 존재도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결한 별빛에 견주기 부끄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페르네 에트르는 별빛을 모방하는 전구의 불빛을 안다. 깨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한 다정 역시 알고 있다. 찾아냈고, 눈치 챘다. 그럼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의 눈에 더 이상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서운 이유는 어째서일까. 아샤가 아샤가 아닐 것 같아서? 아니면, 아샤에게 더 이상 우리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결국 시선을 먼저 돌린 건 그 사람이었다. 이름도 묻지 못했다. 그저 아샤라고 칭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내어주고, 곧 코레 바닐레아에게 등을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페르네는 죽는 것만큼 무서웠다. 이대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금속으로 구성된 케이스, 사람의 온기를 띄지 않는 유품. 돌려받은 시체는 젖어 있었고, 지독하게 차가워서 그다지 현실성이 없었다.

 

 그의 죽음에 페르네는 펑펑 울지는 않았다. 이미 젖어버린 그를 더 적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을 아주 오랫동안 잡고 있었다. 오빠, 라는 말이 목 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족이 됐어. 성씨를 만들었어. 받아줘야지. 당신도 받아줘야지. 왜 알겠다고 하지 않아? 페르네는 아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늦게 돌려받은 그는, 등을 내보인 것 치고는 무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등을 돌렸을 때. 페르네 에트르를 계승한 코레 바닐레아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먼 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모래사장 위로 코레 바닐레아의 발자국이 질질 끌려 찍히고 말았다. 가지 말아줘. 어느새 목이 바짝 말라,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싸우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는 어차피 졌어. 패배하고 말 거야. 그래서 모두 죽을거야. 죽는다면 마지막까지 함께 있자.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도 우리와 함께 있어줘. 코레 바닐레아는 숨도 쉽게 쉴 수 없었다. 걸음이 질질 끌리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토할 것처럼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코레 바닐레아는 기어코 그의 뒤까지 다가갔다. 고작 세 걸음, 세 걸음만 더 나아가면 그 손을 맞잡을 수 있을 터다. 이제야 드디어 온기를 가진 아샤의 손을 붙잡고, ‘왜 이제 왔어.’ 따위의 충동을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에트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레 바닐레아는 헛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 오ㅃ….”

 “오빠!”

 

 

 그러나 아샤를 부른 건 다른 사람이었다. 코레 바닐레아의 목소리는 바람에, 그리고 다른 이의 소리에 먹혀 사라지고 말았다.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니, 해변가 저 건너편에서 한 여자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라기엔 성숙했고, 어른이라기엔 미숙했다. 그가 아샤와 무슨 관계인지 코레 바닐레아는 알지 못했다. 동생인지, 남인지, 제자인지, 그건 코레 바닐레아가 조금도 신경쓸 부분이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샤가 그에게 걸어갔다는 것. 그의 손을 잡고, 바닷가를 빠져나간다는 점. 그리하여 페르네 에트르에게 또 다시 등만 보였다는 점. 끊어진 관계로 하여금, ‘남이 되어버렸다는 점.

 

 허공을 그러쥔 손이 애매하게 흩어진다. 그리하여 코레 바닐레아는 그가 아샤가 아닌,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날 외면할 리 없었다. 또 다시 우리를 버릴 수 없단 말이다. 아샤라고 믿었던 이는 저 멀리로 떠나갔다. 코레 바닐레아는 전생을 기억해내고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두가 다시 만날 것이고, 모두가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손을 잡고 놓지 않을 것이며, 전생에 해내지 못한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 했는데.

 

 왜 세상은 바라는 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까.

 그리하여 페르네 에트르는 아샤를 단 한 번도 오빠라고 부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