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계에도 봄은 다시 오는가. (完)

4. 리오나 A. 에트르의 경우.

Queen  2021. 4. 30. 01:45

 한적한 하루였다. 코레 바닐레아는 느린 행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해가 중천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코레 바닐레아를 깨우는 사람은 없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밤에 늦게 잠드는 대신 아침잠이 많은 사람으로, 아침 시간에 그를 건들면 쉽게 포악해졌기 때문이었다. 서류처리로 하루를 보내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변변찮은 직업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한마디로 말하자면 백수였기 때문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점에도 한몫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아주 느리게 기지개를 피면서 입맛을 다셨다. 오늘따라 문밖이 소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확인만 한다니까요? ? 이거 공무집행 방해야?”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 달라는 겁니다!!”

 

 

 …소란스러운 기분인 게 아니라, 소란스러운 게 맞았다. 코레 바닐레아는 문 바깥에서 가깝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맞춰 이불을 걷었다. 새하얀 원피스형 잠옷이 무릎 위를 사륵 스쳐지나가고, 부스스한 옅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침대에 걸터앉은 코레 바닐레아는 아주 느긋하게, 맨발을 땅에 디뎌 문으로 다가갔다. 바깥에서는 아직도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어, 문고리는 잡는 행동은 여태껏 한 다른 행동보다 빨랐다. 끼익, 문이 열리고. 사용인의 울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데카라비아 씨가 보내셨다고요.”

 “! 경호 임무입니다~”

 “전 집 바깥을 안 나가서 필요가 없는데도요.”

 “집 안도 위험하니까요!”

 “참나.”

 

 

 과하게 활발한 사람이다, 라는 첫인상을 남기면서. 코레 바닐레아는 사용인이 내어준 홍차를 홀짝였다. 상대방의 앞에는 밀크티를 내려놓았는데 말이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검은 머리, 아주 앳되고 어려 보이는 히어로였다. 노란색 눈이 인상적이어서, 코레 바닐레아는 어느새 눈을 내리깔았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에 앉은 히어로는 연신 웃음을 짓고 있어서, 도리어 코레 바닐레아가 침착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름이.”

 “아나스예요!”

 “네에, 그러셨죠.”

 

 

 아나스타시아의 이름을 줄여서 아나스인가. 전부터 생각했지만, 환생자들의 미묘한 규칙이랄 게 존재했다. 이름의 연관성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그냥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한숨을 옅게 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나스의 구겨진 옷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아까 돌발 행동은 정말 죄송해요.”

 

 

 아나스는 웃었다. ‘고고한 공주님을 모시는 건 어려운 일이네요!’라고 대답했던 것처럼 말이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 웃음을 외면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답지 않게 사과를 내뱉는 것은 단순했다. 사용인의 울상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아나스의 얼굴이었고, 그다음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 리오나의 군번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오나 A. 에트르. 세계의 악이자 미련한 패배자들을 위해 기꺼이 함께 죽은, 그리하여 기록되지 않은 구원이란 이름의 천사. 페르네 에트르는 그를 참 좋아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두고 온다는 헌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헌신은 제법 애정을 닮아있기 때문에. 사랑에 목말랐던 페르세포네가 그를 졸졸 따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코레 바닐레아가 그를 찾아 헤맸던 건 어찌 보면 순리에 가까웠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히어로가 되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레 바닐레아는 그의 목에 걸린 리오나의 군번줄을 발견하자마자, 그 연약한 몸을 움직여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표정을 구기고, 목을 긁어 험악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이거, 어디서 구했어.’ 협박과도 같은 목소리였으나 아나스는 웃었고, ‘제거입니다만?’의 태도로 코레 바닐레아의 손목을 살살 붙잡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배려하기라도 하듯, 그는 허리를 살짝 뒤로 기울인 채 코레 바닐레아를 받아주고 있었다.

 

 사용인이 쩔쩔매기 시작하고, 코레 바닐레아와 아나스의 시선이 아주 오랫동안 마주하기 시작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달을 닮은 눈빛을 기억한다. 그러나 달보다 강렬하고 햇빛이라기엔 다정했던 색깔을 알고 있었다. 눈은 영혼의 창, 그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면 상대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법이었다. 리오나의 눈은 언제나 페르네에게 다정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사랑이 깃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나스의 눈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사랑이라거나 애정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리오나의 것과 너무 닮은 눈빛을 지녔기에, 코레 바닐레아는 숨을 참았다.

 

 그리고 그 무호흡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가 코레 바닐레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페르네.’ 그 목소리는 아주 사랑했던 과거의 존재여서, 코레 바닐레아는 그것이 페르네 에트르가 구현해낸 망상임을 확신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의 천사, 나의 리오나. 코레 바닐레아는 이를 조금 갈았고,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야.’ 코레 바닐레아는 아나스를 확 밀치고, 응접실에서 만나자며 방으로 거칠게 들어갔다.

 

 그로부터 정확히 3421초 뒤. 응접실에서 다시 만나 홍차를 홀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자, 레비아탄 데카라비아가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성가시다면 성가시고 고맙다면 고마운 일일 것이다. 아무래도 명계의 망상가를 운운했기 때문에 히어로를 붙여 감시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 계획의 단점을 이야기해주자면, 코레 바닐레아는 페르네 훨씬 더 이성적이고 똑똑하다는 점. 25년의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이능력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치밀하다는 점. 페르네의 충동을 억누르면, 그 어떤 오류도 코레 바닐레아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있겠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도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코레 바닐레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리오나 A. 에트르에게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나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코레 바닐레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어쩌다가 대표님한테 찍히셨어요?” 그 어투는 어딘가 정중과는 거리가 멀었고, 연륜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리오나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코레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페르네가 기대한 것은 이런 재회가 아니었다. 이런 것은 재회라고 부를 수 없었단 말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코레 바닐레아는 마음 속의 무언가가 끊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나스가 ?’ 라는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코레 바닐레아는 그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페르네 에트르가 무언가의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리고, 창백해지는 것을 지켜보던 아나스는 코레의 행동에 맞춰 함께 일어나주었다.

 

 

 “괜찮으세요?”

 

 

 말이 다정했다. 그래, 다정은 했다. 하지만 페르네 에트르는 그런 말만를 바란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나를 안아주었고 언제나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음 생에서도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한 당신을 기억한다. 그런데. 당신이. 감히. 나를. 배신하면. 나는 이 원망을 어디에 쏟지? 코레 바닐레아는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아나스의 표정을 눈동자를 읽어내면서, 손을 뻗어 아나스의 어깨를 잡았다. 손톱이 옷을 파고들 것처럼 날카롭게 바로 섰다.

 

 

 “.”

 “, 코레 씨?”

 “.”

 “지금 이게, 무슨,”

 “왜 기억해주지 않아?”

 

 

 코레 바닐레아는 치미는 구토감을 참지 못하고 응접실에서 도망쳤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과 토사물들이 그를 자꾸만 괴롭히고 있었다. 미웠다.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사랑해주겠다고 했으면서 남이 되어 나타나다니. 0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하지만 우리는 0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 아무것도 쌓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연했다. 우리는 우리의 불행에서부터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평범한 당신은 이렇게 불쌍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게 페르네에겐 퍽 비참한 일이었다. 결국 페르네 에트르는 자신의 방의 문을 잠그고 그날 내내 나오지 않았다. 문 바깥에서 사용인이 연신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나스는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중얼거렸다. 중얼거림 한 번에 꽃이 피고, 두 변에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외딴 섬에 고립된 것 같은 페르네의 어깨를 감싸 안고 리오나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망상은 아늑하다. 이 세상에서 망상이 해결해주지 않는 일은 없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망상의 리오나에게 내가 말을 건넸다. “당신이 미워.” 하지만 리오나는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가짜기 때문에, 더는 리오나를 그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날 아나스는 보고서에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보임.’ 이라는 글자를 코레 바닐레아의 이름 밑에 적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