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니샤 나탈리아의 경우.
바닐레아 부부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데아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이데아를 위해 얼마든지 헌신하며 재물과 시간을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히어로를 후원하기 시작한 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코레 바닐레아는 그런 부모의 헌신적인 행동들을 안다. 그래서 이따금 궁금해졌다. 어머니, 아버지. 프로젝트 바벨을 아시나요. 히어로를 후원하듯, 그것도 후원하셨나요. 그렇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그 프로젝트를 묵인하셨나요? 단 한 번도 묻지 못한 말이었다.
히어로 기관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정부의 편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이들보다 철저히 감춰지고 보호받는 추세였다. 그러니 비대한 망상을 끌어안고 전생에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를 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코레 바닐레아는 바닐레아 부부의 유일한 딸이었고, 딸을 조금 방치해두긴 하였으나 확실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딸이 그럴싸한 업적을 갖길 바랐다. 딸이 태어난 이후로부터는 막대한 양의 돈을 딸의 이름으로 후원하기 시작했으니. 히어로 기관에서도 코레 바닐레아를 마냥 무시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브리핑’ 날이라거나 정기 ‘보고’날에 꼬박꼬박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사실 그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퍼포먼스였기도 했고, 어차피 돈이야 그들이 알아서 써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월급으로 빠져나가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한 수습비로 나가건. 그건 그들이 머리를 싸매고 앓을 일이었지 코레 바닐레아가 신경쓸 필요는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곳에 갔다가 히어로 대표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25년간 어떻게 이능력을 감췄는데. 하루아침에 들켜나 히어로라는 짐을 짊어지고 싶진 않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양산을 펼쳤다. 거대한 히어로 기관이 눈에 보였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머니의 비서가 승인을 도와주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주변을 둘러봤다. 히어로 기관은 위의 이유로 제법 자주 왔지만, 원한다면 이따금 대면할 수 있었지만. 망상이 시작된 이후로는 이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빌런 기지보다 이 곳은 깨끗했다. 사람들이 많았고, 바벨의 모두보다 호의적인 태도로 페르네 에트르를 대해주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이 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곳은 집이 아니니까. 하지만 바벨처럼 삭막하다고 하면, 히어로들은 화를 낼까. 코레 바닐레아가 양산을 접었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어머니의 비서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승인이 끝났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한 히어로가 안내하는 곳으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새하얀 복도와 조용한 사람들, 이따금 누군가가 수군거리긴 했지만 그건 코레 바닐레아의 귀에 닿지 않았다. 이 중에서, 혹시, 그들이 있을까. 나는 걸음이 점점 느려졌지만 옆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디.
느린 걸음을 이끌고 문 하나를 여니, 그 안에는 히어로가 있었다. 니샤 나탈리아였다. 나는 히어로들을 서류 상으로 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히어로들은 이름 혹은 성씨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샤 나탈리아만큼은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멜랑콜리, 라고 너를 부르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코레 바닐레아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 날’ 이후의 기억을 천천히 묻고자 애썼다. 굳이 평범과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좋을 건 없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허리를 숙여 니샤 나탈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니샤 나탈리아 역시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신 것을 환영해요, 코레 씨.”
목소리는 온화했고 다정했다. 심약하다고 느껴질 만큼 가느다랗던 목소리는 어느새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안도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멜랑콜리는 태풍 앞에 바스라질, 혹은 바스라지고 싶어 하는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였기 때문에. 소동물처럼 보였지만 그냥 중증의 네거티브, 절체절망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도 같은 목소리는, 페르네 에트르 살아 생전에 꿈도 못 꾸는 것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멜랑콜리, 니샤 나탈리아를 바라봤다. 웃음은 여전히 상냥했다. 그래서 강인해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다정한 건 쓸모 없는 일이었다. 상냥한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나약한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나는 그것이 강한 자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니샤 나탈리아가 걸음을 땠다. 모시겠습니다, 라는 말에 나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형식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코레 바닐레아는 불쑥, 충동적으로 ‘왜 내게 그 정도의 인사만 하는 것이냐.’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삼켰다. 페르네 에트르는 지독히 충동적인 사람이었지만, 코레 바닐레아는 지독히 이성적인 사람이기에 그랬다.
기억보다 나이를 먹은 얼굴. 기억보다 빳빳하게 펼친 어깨. 다정한 웃음과 걸음 속에서 나는 조금의 기이함을 느꼈다. 나아가는 구나.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너도 걸어가고 있구나. 살아가고 있구나. 니샤 나탈리아는 후원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새로운 히어로들에게 어떤 형태로 투자되고 있는 지,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이 서류를 외우기 위해 어젯밤, 잠을 조금 줄여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고, 후원금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 것인지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서 나는 히어로 기관 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래서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다정한 채로 다시 시작하는 걸까…. 나는 히어로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그것들은 대부분 원망과 질책이 섞인 말들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히어로가 미웠다. 정의의 편이라면서, 약자들을 수호하면서. 왜 우리들의 편만큼은 들지 않았는 지에 대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니샤 나탈리아에겐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반 쯤 흘겨 들었다. 귀를 기울이면, 그대로 그에게 이 마음을 충동처럼 쏟아낼 것 같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코레 씨?”
내가 넋이 나가 있는 걸 눈치 챘는지, 니샤 나탈리아는 상냥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으신가요? 말 한 마디가 다정했다. 만약 괜찮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그는 근처 의자에 나를 앉혀두고 손을 잡아줄 것이다. 무엇이 문제냐며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외부적인 상처라면 치료를 해줄 것이고, 내부적인 상처라면 일회용의 위로를 건네줄 것이다. 하지만 멜랑, 나는 위로로도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렸어. 나이를 먹어 50세를 넘긴 네 얼굴 위로 끊임없이 24세의 멜랑콜리의 얼굴을 덧그리고 있거든.
나는 네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다정한 것을 보면 속이 쓰리는 것 같아. 영원히 그 기억을 갖고 살아주어야지, 우리를 기억해야지, 왜 행복해 보이는 거야? 우린 죽었는데. 너희들로 인해 죽었는데. 부질없는 원망에 웃음이 일그러진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이야기했다.
“괜찮습니다. 걱정에 감사드려요, 멜랑콜리 씨.”
니샤 나탈리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결국 나는 도망치듯 히어로 기관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오늘 안내인이 니샤 나탈리아였던 것을 모른 건 내 패착이다. 나는 입을 꾹 틀어막으면서, 다시 니샤 나탈리아의 안내를 받아 정문으로 다가갔다. 이 삭막한 걸음 속에서 말을 하는 건 90%가 니샤 나탈리아였다. 감흥 없는 대꾸를 들으면서도 그는 성실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주 많이 골랐는데. 그 중 가장 상냥해 보이는 것을 고르고 골랐는데. 결국 전하지 못해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벌써 정문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코레 바닐레아 씨.”
니샤 나탈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처음과 같이 형식적인 인사였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눈을 들었다.
“저 역시 영광이었습니다, 멜랑콜리 씨.”
이 이름으로 언급할 때면, 니샤 나탈리아의 시선은 애매해진다. 그 긴 세월이 있었음에도 니샤 나탈리아는 멜랑콜리 였기에 나는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30년이란 세월은 흔들림에 담긴 감정을 숨기기에 충분해서, 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시선을 내보였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음에는, 페르네 에트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리 말했다. 내 뇌내를 거치지 않고 툭, 페르네가 말을 꺼낸 것이었다. 무언가 ‘실수했다.’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니샤 나탈리아의 손을 놓고 그를 지나쳤다. 문이 열리고, 양산을 팡 펼치면서. 나는 니샤 나탈리아의 마지막 시선과 표정을 보지 못했다. 등 뒤로 ‘코레 씨?’ 라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바닐레아 부부가 보낸 차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로 걸음이 미약하게 따라붙는 것 같았지만, 니샤 나탈리아는 몇 걸음 걷고 포기했다. 나는 완강하게 등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니샤 나탈리아에겐 유감스럽지만 나는 평생 오늘의 의문을 해소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니샤, 멜랑, 페르네 에트르로 하지 못했던 걸 코레 바닐레아로 할 수 있을까. 너랑 친구가 될 수 있으려나? 코레 바닐레아는 차에 올라다 창문에 고개를 톡 기댔다. 어느새 차 옆자리에는, ‘그 시절’의 멜랑콜 리가 나타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 망상은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