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코레 바닐레아의 경우.
바닐레아 가문은 이데아의 핵심 권력층에 속한 몇몇 인원들 중 한 명이었다. 바닐레아 부부는 오래전부터 이데아에 모든 것을 바쳐 일한 고위급 정치인으로, 청렴결백하고 언제나 진솔 되어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 중 한 명이었다. 휘하에 외동 딸 한 명을 두고 훌륭히 키워냈으나, 아쉽게도 그 딸은 몸이 약해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닐레아 부부는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딸과 함께 조용히 이데아의 재건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하였다.
딸의 이름은 코레 바닐레아였다. 갓 태어난 그 아이는 옅은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어, 바닐레아 부부를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닐레아 부부의 머리카락은 옅은 백금발이었는데, 딸만큼은 어두운 색상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이었나. 눈은 또 선명하게 붉어, 과거의 어느 날이었다면 ‘악마의 자식’이라 불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아이를 악마라 칭하지 않았고, 코레 바닐레아는 평범하게 자라났을 뿐이었다. 조금 약한 몸을 갖고 말이다.
코레 바닐레아는 이데아 2130년을 기준으로 25세가 되었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갖고 태어나, 오늘 내일 하던 숨이 있었다. 집 안에서만 자랐는데도 작은 바람에 휘청였고, 너무 밝은 날이면 잠을 자지 못해 숨이 막히기도 했다. 바닐레아 부부는 딸을 사랑했지만, 일상이 너무 바빠 그런 딸에게 신경 쓰지 못했고. 결국 코레 바닐레아는 스스로의 힘 하나만을 갖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삶에 승리하여 24세까지, 라고 했던 주치의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25살의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렇다고 몸이 영 좋아진 것은 아니라,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코레 바닐레아는 집에서만 지냈다. 이따금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인생의 80%를 집에서 보낸 만큼, 일상 역시 집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코레 바닐레아는 활발하게 바깥을 쏘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를 제지해줄 부모는 이데아에 목숨 바쳐 일하고 있으니, 코레 바닐레아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최초로 히어로 기관에 찾아갔다. 레비아탄 데카라비아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다.
히어로들의 대표인만큼, 당연히 그는 쉽게 만나주지 않았지만. 바닐레아 부부는 이데아의 핵심 정치인 중 하나, 그리고 31년 전, 히어로 기관이 설립되었을 때부터 그들을 후원하고 지원한 부유층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딸이 태어나자 딸의 이름으로도 후원을 계속해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백 배는 수월하게 히어로 대표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레비아탄 데카라비아를 만나고서 코레 바닐레아가 부탁하거나 이야기한 것은 없었다. 레비아탄 데카라비아의 얼굴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좋은 시간이었노라 떠난 게 전부였다. 그 이후로부터 정기적으로 ‘브리핑’ 날에 맞춰 히어로 기관에 들락날락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도 없이 손님으로 찾아오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코레 바닐레아의 외부 활동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쯤부터, 코레 바닐레아는 악몽을 꾸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도 들린 것 같았다. 허공에 말을 걸기도 했고, 밤마다 기겁하며 사용인들을 부르기도 했다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해 물어보면 코레 바닐레아는 양산을 펼친 채 웃어보일 뿐이라, 아무도 진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코레 바닐레아는 정치적인 활동도, 그렇다고 이능력자인 것도 아니었다. 히어로도 아니고, 공인인 것도 아닌 그가 25년의 침묵을 깨트리고 바깥에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누구에게도 답해본 적 없었으나 코레 바닐레아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잊으려고 애써봐야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내 삶을 이렇게 망가트리려 벼락처럼 찾아온 기억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잊고 살기엔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다. 울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거울을 바라본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옅은 보랏빛 머리카락. 짙다 못해 불쾌할 정도로 선명한 붉은 눈. 새하얀 피부와 매끄럽게 지어지는 웃음. 전부 코레 바닐레아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코레 바닐레아의 눈에는 자신의 얼굴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게 보였다. 눈 밑으로 선명하게 그려진 눈물 문신. 페르네 에트르의 것이다.
코레 바닐레아는 거울에 손을 얹었다. 25살의 생일 이후로 매일 같이 거울을 들여다봤다. 매일 같이 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기괴하다며 혀를 내둘렀고, 꿈이 이어지자 소름끼친다며 비명을 질렀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전투, 폐허같은 기지에서 손을 맞잡은 기억, 웃었고, 울었던 모든 나날. 그리고 쏟아지는 비와, 죽음. 페르네 에트르라는 이름과, 잊지 말자는 짧은 약속. 코레 바닐레아는 그 기억에 잠겨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꿈속에 있는 히어로들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30년 전, 빌런들을 처리하고 온 이데아의 영웅들이었다. 코레 바닐레아는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라며 애써 불쾌감을 억눌렀으나 그들의 말 속에서 ‘에트르’의 이름이 들린 순간 코레 바닐레아는 울어버렸다. 그리하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벼락처럼 찾아온 전생의 기억은 너무나도 괴로운 것이었다.
페르네 에트르는 죽었는데, 그의 기억은 이렇게 계승되었다. 페르네는 무엇을 바란 것일까. 무엇을 기도한 것일까? 코레 바닐레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웃음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 모두를 찾지 못했고, 모두를 만나지 못했다. 하다못해 잘 지낸다는 편지 하나라도 보내주지, 라는 생각이 들어 야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코레 바닐레아는 거울 속 자신의 이름을 재정의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겐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이름은 페르네 에트르. 코레 바닐레아로 환생한 빌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