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안에서 적힌 편지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글씨였다.
■■하는 ■의 ■■■, ■■■ ■ ■■■에게.
답장이 늦었습니다. 사과의 말을 사랑과 동봉하며 변명을 적습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려다 보니, 펜을 잡을 시간이 영 없어지기만 하는군요. 저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잠깐 씩 생기는 공백마다 감정이란 잉크를 꾹꾹 눌러 적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편지지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취향은 어째서인지, 너무 어려운 것이기에. 모든 딸이 그러하듯, 고민만 자꾸 늘어나기에.
진실을 가장한 거짓 편지를 받지 않았다는 말을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아시듯 저는 거짓에 능통하고 헛소리에 강한 존재입니다. 진실과 거짓은 아주 유사한 색을 띄고 있으나, 명계의 망상가가 그것마저 구분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리하여 기뻤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순백의 글자들은, 제가 여태껏 본 어떠한 편지보다 진실되었기에. 천사의 날개보다 새하얘서 이따금 슬퍼질 정도로 솔직한 글자들로 하여금 저는 제 꿈이, 빌어먹을 머리에서 비롯된 공상 따위가 아님에 감사했습니다. 이 곳에서의 당신은 여전히도 다정하시네요. 분명 그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울어버릴 것 같아, 저는 당신의 얼굴을 눈꺼풀 안 쪽 깊은 곳에 묻어두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에트르의 이름을 묻어둔 마음을 들춰냈습니다. 새삼 그 의미가 궁금하셨다는 것을 저는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어머니, 보이세요. 저는 이제 제 이름을 똑바로 적을 수 있게 되었어요.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고, 현실을 살아가요. 입으로 뱉으려면 말문이 막혀 괴로워하면서도 저는 그 풍경을 똑바로 그리고 있어요. 내 꿈은 한 평생 나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를 이끌어주는군요. 다행이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당신도 꿈을 꿨구나. 투정을 부릴 수 있겠구나. 울면서 안겨도, 날 안아주겠구나.
비가 그친 하늘은 아름다웠지만 우리가 딛고 있던 땅이 더러웠음을 기억하고 있어요. 흙탕물이 튀고, 우리의 발자국이 움푹 패여 신발을 더럽히곤 했죠. 당신은 수많은 사람과 걸음을 마주하고, 빙글 돌아 흘려보냈음을 기억해요. 그리고 저는, 제 차례를 기다리고 당신의 손을 맞잡았음 알고 있어요. 저는 그때 기뻤던가요, 좋았던가요. 이제와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렇게 느끼셨다면. 저 역시 그랬을 거예요. 그 순간의 제가 울 것처럼 웃은 것 같아서. 당신의 품이 따듯해서.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우리조차 완벽한 피해자만은 아니었을테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우리는 결국 세상의 멸망과 발맞춰 걷는 극악무도한 존재들이었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알지 못해요. 그래서 슬퍼지고, 그래서 자꾸만 괴로워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머니. 그렇다고 우리가 무자비한 죄인이기만 했나요. 죄를 지었기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업화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아니요. 아니지요. 죄책감에 짓눌리진 마세요. 답답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의 아픔은 우리의 죄 이상의 것이기에, 스스로를 탓하지 않으셔도 됨을.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어요. 세상이 우리에게 다정하지 못한 까닭을 스스로에게 찾지 마시길.
그걸 위해 당신의 딸은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 슬픔에 잡아먹히지 않게 지금의 행복을 충실히 살아가길 기도하고 있어요.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다보면. 언젠가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제게 어머니가 찾아와 주신 것처럼. 지금 저에게, 편지가 온 것처럼.
저는 늘 좋은 부모가 부러웠어요. 다정한 사람이 좋았고요. 하지만 아는 바가 없어 무엇이 좋고 그른지 알 수가 없네요.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기준이 있어요. 선망이 있고, 꿈이 있어요. 리오나, 라는 세 글자를 적을 때면 가슴이 벅차서 참을 수가 없었고, 눈물이 차올라서 옷소매를 적시곤 해요. 그래 놓고 웃는 저를 바라볼 때면 당신은 제게 좋은 부모였구나. 세상이, 그리고 당신조차 당신을 그렇게 평가한다 한들. 저에게만큼은 영원보다 다정한 부모구나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쁘게 받아주세요. 부디,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승낙해주신다 하였지만 저는 아직도 거절이 두려워 당신이 적어준 주소를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매겠지요.
이 편지는 저를 만나고서 읽게 될 테니, 그 간의 감정을 조금만 적도록 할게요. 말로 하면 분명 펑펑 울어버리느랴 무엇 하나 똑바로 전할 수 없게 됨을 아니까요. 어머니. 리오나. 가족의 연을 맺기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죠. 우리들은 시간에게 내쫓겨 헐떡거리곤 했습니다. 인생에서 아주 찰나만을 소비한 인연이 제대로 된 인연일까요. 각오나 인연은 삶이란 강물에 밀려나가, 결국 다음 생에서조차 제대로 맺어지지 않았네요. 꿈의 형태로 잔존해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게, 저에게는 기이하게까지 느껴지고 말았습니다. 고작 찰나의 정에 휩쓸려 행복하지 않다는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울어버린 저 역시도, 기괴하게만 느껴지네요.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요?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아가다가, 행복하다며 웃을 수 있고, 함께 손을 잡고 잠들 수 있을까요.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똑바로 그릴 수 있을까요. 의문이 자꾸 늘어나고, 답은 찾을 수가 없어요. 괜찮을까요, 괜찮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다시금 가족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내다 보면. 우리,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겠죠?
어머니, 역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이 편지를 끝맺지도 못했고, 생각을 다 정리하지도 못했는데요. 얼굴을 보고 똑바로 말할 수 있을까요. 전 지금도 이미 울고 있는데 말이에요. 어머니를 닮은 꽃을 샀어요. 시간이 많아서요. 어제에게 내쫓기지 않고, 분명히 오늘 고른 꽃이에요. 아, 벌써 눈꺼풀 안 쪽이 쓰리기 시작해요. 당신의 윤곽이 흉터처럼 남아서, 저는 가게가 보이기도 전에 걸음을 멈출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절 보고 너무 웃진 말아주세요.
사랑하는 나의 천사를 만난다는 사실에 울지 않을 딸은 세상에 없답니다.
그럼, 십 분 뒤에 만나요.
■■■ ■ ■■■의 ■,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