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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문안

Queen  2021. 4. 14. 23:47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를 한참. 한 병원 앞에 차가 멈춰 선다. 금액을 이야기하는 택시기사에게 카드를 대충 내밀면서, 핸드폰 속 지도를 살펴보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에 덩그러니 서 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들이 요란하게 휘날리고, 나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이미 알아두었던 꽃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연이 끝나고 지난 시간도 며칠. 그 사이의 페르네는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고를 수습해야 했고, 그 사고를 수습할 때 쯔음에야 의미를 모를 메일들이 -그러니까, 꿈에 관련된 것들이.- 폭탄처럼 밀려들어와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분류하다, 새벽마저 끝나갈 때쯤에 잠드는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바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작가의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니. 초인이 아니고서야 쓰러져도 무방한 상황이라며 페르네는 조소를 흘렸다. 

 

 꽃집에 들어가자 싱그러운 것들이 페르네를 반긴다. 페르네의 눈에는 그게 그거고, 딱히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눈을 몇 번 굴리면서 꽃들을 지켜보았다. 어떤 게 예쁠까, 어떤 게 좋을까? 그러나 소설을 쓸 때 참고자료로 외워둔 지식들마저 스르르 빠져나간 페르네가 꽃다발을 구성할 수 있을 리 없다. 직원이 와서 묻는다.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페르네는 난처하게 제 뺨을 긁적이다가, 꽃집에서 준비해둔 꽃들의 시작부터 끝을 가리키며, 전부 다 넣어서 예쁘게만 해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조금 놀란 눈치의 직원이 얼마까지 생각하셨느냐며, 용도는 무엇이냐 묻자, 페르네는 적당히 예쁜 미소를 지으며 병문안에 쓸 꽃이니,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예쁘게만 해달라며 '예쁘게'를 강조했다. 

 

 SNS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거기에 돈과 시간을 살짝 들이면 거의 정답을 알려준다 해도 무방했다. 페르네가 이 병실을 찾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사실 이런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기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양심이 아프고, 그다지 올바른 루트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페르네는 자신의 손을 가득 덮은 피의 온기를 기억한다. 그리고, 이성을 지배하는 갈망은 언제나 양심을 이기는 법이었다. 로젠에겐 어떻게 변명하지, 를 잠시 고민하다가. 뭐, 상관 없겠지. 라며 눈을 굴렸다. SNS는 잘 사용하지도 않아 놓칠 뻔한 것을 마주하는 건 역시 운명, 이라는 것이겠지. 당연했다. 생을 넘어서까지 함께하자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결국 운명끼리 엮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이 될 수밖에. 페르네는 한 손으로 들기엔 조금 버거운 꽃다발을 들고 핸드폰을 다시 고쳐 잡았다. 안녕하세요, 페르세포네 작가님. 로젠에게 듣기엔 낯선 호칭이었다. 

 

 이름은 로젠이라고 했다. 성은 없고, 그냥 로젠이라고. 그런데 자꾸 누가 로젠 에트르, 라고 하는 것만 같다고. 그것은 페르네의 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기 충분했다. 일정을 미루고, 피곤한 몸을 이끌어 먼 곳까지 행차할 정도로 소중한 말이 되어버렸다. 나를 보고 누나라고 불러주었지. 이제 또다시 불릴 수 있을까, 불러줄까. 내 글을 좋아하는 만큼 네 누나를 다시 한번 더 좋아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페르네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 접수 데스크에서 느리게 병문안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간호사는 잠깐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환자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냐 물었다. 페르네는 맑게, 그리고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누나예요. 간호사는 딱히 믿지 않았지만, 절차상 어긋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쉽게 호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페르네는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 팔찌도 들고오지 않았다. 꿈을 꾸고서 똑같은 것을 구하기 위해 애썼는데, 똑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하다 못해 귀걸이라도 직접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싶었지만, 비슷한 것이라도 착용하면 되지 않겠는가 싶었지만. 페르네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하지 못했다. 그것은 함께 있었을 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페르네는 언제나 화려하고 긴 귀걸이를 착용했지만, 생일이 지난 이후 그것들을 전부 서랍 깊숙이 처박아버린지라 뚫린 구멍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같이 하기로 했으니까. 두 번의 고통을 감수할 가치가 있으니까. 페르네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환자의 호실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헐, 저 사람 페르세포네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한 것도 같았지만, 페르네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닫힌 문이 보이고,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페르네는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려두었다.

 

 드디어. 

 잠 들지 않는 너의 얼굴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페르네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벅찰 정도로 큰 꽃다발이 흔들리고, 페르네는 울음을 한 번 삼켜 웃어 보였다. 로젠과 눈이 마주하는 사이, 그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사이. 페르네는 천천히 꽃다발을 내밀면서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언제나 로젠을 올려다보았는데, 침대에 앉은 그는 페르네보다 낮기만 했다. 페르네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로젠은 당황스럽다는 듯 아무 말도 못 하길 한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공백을 놓치지 않고 페르네가 덧붙였다. 지금부터 당신의 누나가 될 예정인데, 시간은 괜찮으신가요? 맑은 웃음소리가 터지고, 로젠 에트르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따라붙는다. 사랑하는 가족을 한 명 더 찾았다는 사실이 페르네에겐 환상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