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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2021. 4. 14. 00:49

 우리는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지었다.

 

 집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열셋이라는 대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집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의 우리가 지은 집은 리오나와 노아가 머리를 맞대고 짠 설계도를 기반으로 하여 지은 집이었다. 이층짜리 집이었고, 조금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살기엔 문제가 없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우리는 후다닥 올라가 잠을 청하기도 했다. 바벨탑을 벗어난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잘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최초의 밤이었다. 물론 이런 집은 태풍에 휩쓸려 버릴 것이라며, 이후 루나가 돈과 인력을 동원해 수리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3층의 거대한 저택을 짓고 사는 대가족이 되어버렸다.

 

 우리 집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엄청 큰 것도 큰 것이지만, 첫 번째로는 거울이 없다. 화장실에 겨우 있다지만, 그 마저도 세 개 중에 한 곳에는 설치하지도 않았다. 세리아 언니는 거울을 보는 걸 싫어하니까, 그러나 우리도 거울을 봐야 하니까. 최소한의 접점만 남겨두자, 라는 암묵적인 협의로 그렇게 지었다. 우리가 우리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그건 너무 삭막한 세상이 될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을 꼽자면, 거대한 창문이었다. 우리 집의 방마다 창문이 뚫려 있었다. 어느 하나 꽉 막힌 곳이 없었고, 문들도 애쓰지 않으면 꽉 닫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우리들은 밀실을 아주 싫어했고, 갇히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넓은 창의 창문은 얇아, 조금만 힘을 줘도 스르륵 열린다. 바깥공기에 바다내음이 짭짤하게 들이친다. 우리는 아주 추운 날을 제외하곤 창문을 잘 닫지 않았다. 창문 대신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면 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은 무척이나 알록달록 했다. 우리 집의 외관은 우리가 직접 페인트칠을 했다. 울퉁불퉁, 고르지 못하게 펴발라진 페인트들은 하나같이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어울리는 조합도 있었고, 괴랄한 조합도 있었다. 특히나 밑부분에는 얼룩덜룩한 손자국마저 나 있었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더 낫지 않느냐, 누군가 물었지만. 우리들의 추억을 쌓고 싶어 이리 했다고, 우리들 중 누군가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옷에 페인트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롤러를 굴렸다. 푸른 하늘 밑으로 땀방울이 툭 떨어지고 우리는 웃었다. 우리 집에는 흰색 공간이 없다. 그 어떤 것에도 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우리를 위한 자비였다. 악몽을 꾸지 말라는, 일종의 드림캐쳐 같은 색의 장막. 우리들은 그렇게 우리가 가꾸어낸 집을 사랑한다. 아주 많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녔으므로. 정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15분 거리에는 바닷가가 있었고,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고요했다. 방은 사람 수만큼 많았지만, 사람은 방만큼 많지 않았다. 저마다 떠나는 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치우면 치웠지, 잡동사니를 밀어넣으며 창고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돌아올 수 있는 곳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잠을 잤고, 밥을 먹었고, 웃고 떠들다, 피곤해지면 다시 드러누웠다. 뒤쪽 마당에는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고, 앞마당에서는 이젤을 놓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거실에는 큰 테이블을 하나 놓아두고 서로 공부를 하기도 했으며, 주방에서는 언제나 고소하거나 짭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 TV 앞에 모여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든 일상이 평범했다. 평범한 것 같았다. 

 

 비록 우리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이따금 놀러오는 히어로들이 전해주기 때문에, 우리들은 굳이 암울한 이데아의 나날을 속보로 듣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는 바싹 구운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며 일기예보만 빠르게 확인했고, 점심에는 가볍게 라면을 끓여먹으며 고전 영화를 보기도 했다. 저녁에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준 채로 시끄럽게 웃으며 나갔다 돌아온 잭 오빠가 산 먹을 것들을 풀어헤쳐 나눠먹기도 했다. 사이사이 미스티와 함께 깎인 사과, 그리고 딸기를 나눠먹기도 했고. 리오나가 준비해준 구움 과자 들을 먹기도 했다. 시간의 공백이 생기면 로젠과 텃밭에 나가 잡초를 뽑기도 했었다. 히어로가 오는 날이면, 우리들은 모두 멀뚱멀뚱 거실에 앉아 있기도 했다. 더글라스의 귓가에 '바다엔 못 가겠네.'라는 이야기를 하여 그를 시무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레비아탄과 이디스와 잘 놀았으니 된 일이었다. 잘 놀았다고 뭉개 말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건 웃었고, 어쨌건 즐거웠으니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실에 발랑 누워 레비아탄이 사왔고, 릴리 언니가 깎아준 배를 포크로 찍어 아삭아삭 씹었다. 리오나는 그런 나에게 '누워서 먹지 말라.' 라며 엄하게 경고를 주었지만, 나는 '네네~'의 대답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눈치를 보듯 눈을 굴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오나는 그 이상으로 혼을 내진 않았다. 히어로들이 오는 날은 어째서인지 어수선해지고 만다. 당연했다. 우리는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우리를 받아들였다. 여즉 죽이지 않고 놔둔 것을 보면 분명히 받아들여 준 것이었다. 우리도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따금 이디스가 아샤를 흠뻑 적신 일에 대해 놀리면서도 그에게 물을 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마음을 아주 활짝 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만 해도, 비가 쏟아질 기미가 보여 그의 손에 우산을 쥐여줬으니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좁은 걸까, 라는 고민도 잠깐 했지만. 이디스가 웃었으니 뭐,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라며 정신승리를 거두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내일 산에 가기로 했지.' 나는 내일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동시에 딸기를 입에 한 가득 넣은 미스티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사진기는 준비 됐죠?'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싶었는데, 거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늘한 봄을 지나치고, 매서운 여름을 견뎌 이제 포근한 가을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은 처음 맞이하는. 사실 처음은 아니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론 처음 맞이하는 가을을 기념하기 위해 산으로 놀러 갈 것을 약속했다. 내일을 위해 노아 오빠는 그 바쁜 일정 속에서도 휴일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로이드도 와준다고 했는데, 사실 아침이 밝아야 확정될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올 것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힘들어도 말이다. 그거야 내가 그렇게 생 떼를 썼고, 가족 모두가 동의해준 일이었는 걸…. 다만, 하나의 복병이 있다면 히어로들이었다. '히어로들은 누구누구 온대?' 엔조가 묻자, 우리들은 눈을 굴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빌런이었다. 사회가 낳은 괴물이었고, 나아가 반사회성을 띈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아주 좋으니 조용히 살겠다고 하지만, 히어로들의 입장에서는 시한 폭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의미로 우리를 살려둔 건 대단히 배짱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감시의 목적을 띈 동행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나들이에 동행할 것이었다. 누가 올까? 우리들은 그것을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전부가 왔으면 좋겠다~ 따위의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맞댔다. 내일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 가 오늘의 가족회의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이 곳에 살면서 사계절의 전부를 지켜보지 못했다. 살아남은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단텔리안은 더 이상 보스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도 그저 한 명의 에트르, 누군가의 동생이자 오빠, 형이 되었을 뿐이다. 이능력을 꺼내 미칠 것처럼 싸우지 않았다. 더 이상 목숨을 걸 일은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의 규칙에 목 매일 필요도, 실험을 당할까 전전긍긍 앓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았다. 내일에는 무엇을 할까, 앞으론 뭘 할까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어느 날에는 심심해지면 바닷가로 달려 나가 발목을 적시는 파도에게 인사를 나누었고, 보라색 물방울을 서로에게 튀기며 축축해진 몸을 이끌고 초록빛 노을에 작별을 고했다. 직전에 몰려온 노란빛 여름에는 새카만 수박을 깨부숴 속 알맹이를 나눠먹었고, 이제 다가올 붉은색 가을에는 서늘함에 발맞춰 걷다가 서로를 끌어안고 뛸 것이다. 그렇게 겨울이 되면, 우리는 저 분홍색 보온병에 코코아를 담기로 약속했다. 아직 일 년이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내일을 점점 더 사랑할 수도, 꿈꿀 수도 있게 되는 법이었다. 

 

 사진의 구도를 한참이고 고민하다가, 가족들이 하나 둘 곯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이 없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모처럼 인간답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 시작한 이상 잠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릴리 언니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였다. 릴리 언니는 자연스럽게 베개를 들고 왔다. 나는 그 옆에서 이불을 깔았고, 이불이 다 깔리자 잠든 이들을 아샤 오빠가 옮겨주었다. 우리도 오늘은 그냥 거실에서 잘 까요, 라는 나의 말에 그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과 베개를 더 들고 왔다. 나는 적당한 자리에 몸을 집어넣어 누운 뒤에, 이불을 끌어 덮었다. 오늘은 사실 모두랑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중얼거림이었다. 우리는 이따금 모두 다 함께 거실로 모여 나와 공포 영화 같은 것을 보기도 했다. 무척이나 즐거웠다. 무섭지는 않았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자 엔조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내일 갔다 와서 같이 보자고 하자. 우리는 소곤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따금 우리들은 손을 맞잡았고, 그 잡은 손이 습해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 암묵적인 규칙, 같은 일이었다. 

 

 내일의 우리들은 히어로들과 함께 길을 걸을 것이었다. 차를 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총을 겨누지도, 칼을 들이밀지도 않을 것이었다. 물론 싸우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직도 우리는 만나면 으르렁거렸고, 어쩔 때에는 서로의 머리채를 잡았다. 셀리나의 이마팍을 따악 때리면, 그도 지지 않고 내 이마를 따악 때렸으니까. 멜랑콜리가 우리를 말리는 사이, 데릭이 한숨을 쉬며 셀리나를 뒤로 물리곤 했다. 베로나가 말했다. 하, 하지마세요. 나는 그때마다 중지를 치켜세웠다.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어쩔 때에는 코피도 봤고, 어쩔 때에는 누군가 기절하기도 했었다. 에덴이 스파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했고, 전 보스와 히어로 대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시끄럽게 떠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굴 죽일 것처럼 화내지도 않았다.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놀면서. 시끌벅적함이 사그라들 때 즈음에 적당히 헤어진다. 작별을 고하고, 다시 만날 것을 이야기한다. 많은 발전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부탁이란 것도 하기 시작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이 것도 사다주라. 멜랑콜리가 난처하게 허락했다. 뻔뻔한 부탁을 통 거절하지 못하니, 저런 심약한 마음으로 얼마나 더 히어로를 할 수 있을까 걱정될 뿐이었다. 데릭이나 헬리센 같은 경우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며 대꾸를 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다음에 올 때면 부탁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사 와주곤 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에 적을 스며 넣어놓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폐허 속에서 아주 많이 싸웠다. 아주 많이 울었고, 아주 많은 앙금을 낳았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늘 간사해서, 이 평화의 시간에 사르르 녹아버린 원망을 끄집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상처로 남은 것은 그냥 다쳤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은 분노나 원망으로 아주 오랫동안 남아, 이 평화를 망칠 정도로 대단하고 각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으로 아파하며 원망하기엔 시간만이 아까웠다. 나는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로이드를 올려다보며 유독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이미 많이 지쳤고, 누구 하나 예외 할 것 없이 너덜거렸다. 세상에게 혹사당하고, 바벨탑의 차별을 받은 우리는 이 평화가 진귀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어로라고 해서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내일 히어로들을 만나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될까. 생각이 이어지려다가, 달칵, 하고 불을 끄는 소리에 끊겼다. 리오나였다. 어서 자야지, 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잠에 들었고, 이런 식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바닷가 근처에 집을 지었다. 이 평화의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 곧 …일째의 해가 떠오를 것이고,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평화의 이름을 덧그리겠지. 내일은 오랜 앙숙, 그리고 오랜 전우들과 다 함께 웃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길 바라야겠다.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우리는 까무룩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