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몰려와도 추모는 영원했다.
■■■ ■■■에게.
나는 식어가는 손을 아주 많이 맞잡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이 순간에 왜 망상은 피어나지 않는 걸까. 세상에, 나의 명계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것이었나.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구원자의 그늘은 제법 길었고, 히어로들의 인영은 제법 흐릿했다. 나는 저물어져 가는 붉은색 세상 속에서 느리게 웃었던 것 같다. 정말로 불쌍한 건 누구일까. 정말로 가여워지는 건 누구일까? 괜찮아,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영원토록 이름을 남길 테니까. 우리는 우리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해질 테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건 당신들의 역할이겠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건 이제 우리의 역할이야. 나는 나의 손이 식어감을 느낀다. 우리들의 멸망에서 내쫓긴 당신은 어디로 향할까. 에덴이 멸망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데아의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어느 세계에서는 당신이 내 손을 잡고 바다를 걸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영원토록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페르세포네는 왜 석류를 세 알이나 먹었을까. 신의 몸을 타고 나서,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않은 존재인 그 봄의 소녀는 석류를 입에 머금었다. 톡, 하고 씨앗이 터지는 감각이 느껴지고. 상큼하다는 기분이 들 때에 그 봄의 소녀는 차가운 명계의 권위자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이름은 왜 페르세포네였을까. 그것은 신화와 다르지 않는 이유였다. 나는 현실을 알고, 명계를 안다. 하지만 나는 현실에 몸을 담지 않았고, 정신을 뜯어내 명계에 담가 두었지. 카론이 배를 끌고 나타나면 나는 그 배에 천천히 몸을 뉘이곤 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잔잔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아늑했다. 나는 명계에 자진하여 남은 멍청한 인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질하겠지. 미친 계집이라 입을 모아 험담을 늘어놓겠지.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나에 대해 조금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페르세포네는 멍청해서 명계에 남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명계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기어코 승리를 얻어낸 것이었다. 나라고 다를까, 나라 해서 다를 이유가 있을까? 나는 잠겨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강의 물에 손을 담갔다. 나는 기어코 승리를 쟁취해냈다. 암담한 현실에서, 행복을 꽃피웠기 때문에.
그러니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다. 세상이 주지 못한 것을, 세상이 허락하지 않은 것을 나 스스로 구축해 쟁취해냈다. 그러니 누구도 나를 매도할 수 없었다. 나를 비난해서도 안 됐고, 나를 동정해서도 안 됐다. 나를 동정하려거든 이 세상에게 먼저 분노를 쏟아내야 했다. 나는 불쌍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이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울어도, 당신이 화를 내도, 당신이 얼마나의 사랑을 품었대도. 나는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로 희끄무레한 나뭇잎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속절없이 끌어안아도, 나락 깊은 곳으로 떨어트려도. 나는 슬프지 않았다. 슬프고 싶지 않았다. 피곤한 세상이었다. 행복하기도 벅찬 세상이었다….
까마귀가 울었다.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영원한 행복이자 기다림일 뿐이다. 나는 아직 한 사람의 자리가 채워지지 않은 가족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 명계는 언제나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식어있는 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따듯한 손이었다. 나는 그냥 그 온기에 취해 나들이를 가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이 오면 바다에 가는 거야, 가을이 오면 산으로 떠나는 거지. 낙엽을 주워 책 사이에 끼워두고, 예쁜 꽃을 말려 앨범에 장식을 하자. 그런 소소한 이야기가 끝나 앨범이 완성되면, 그 마지막 장에는 당신이 나와야만 했다. 까마귀가 웃으면서 작별을 고한다. 이제 괜찮아졌어?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빠에게 안부 전해줘. 죽음이란 모든 서사의 종결점, 완성과 새로운 시작. 슬프게도 당신이 바라는 것은 당신이 살아생전 마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 나중에도 아버지가 되어준다면, 그때에는 보여줄 수 있겠지.
기다리는 것은 자신있다고 생각했다. 24년의 시간을 기다림, 희망 따위로 연명해온 것은 나니까. 하지만 지각생은 많이 미웠다. 원래 그런 법이었다. 나는 마지막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니 죄책감에 대한 망상은 그만두길 바라며. 사랑이란 이토록 애달픈 것이기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여 완성되는 것이기에. 언젠가 이 곳으로 놀러 오길 바라, 로이드. 혹은 ■■■ ■■■. 그 때에는. 화관을 씌워줘. 봄이 온 것처럼. 코레를 다시 만난 데미테르인 것처럼. 이 현실이 망상인 것처럼.
그리하여 가족이 된 것처럼.
천방지축 딸을 영원히 추모하길 바라.
미련한 나의 아버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