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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무대 앞에서, 아주 조금 후회했어.

Queen  2022. 3. 26. 23:45

최악을 대비하기 위하여.

 

첫 번째.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타인이 내보인 긍정과 희망에 배신당하는 건 아프다.

 

두 번째.

생각과 의심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순간의 허점이 생긴다면, 연약한 마음이 부서질 것이다.

 

세 번째.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

긍정적인 생각에 잠겨버리면 부정을 대비할 수 없다.

 

네 번째.

타협과 만족을 기억한다.

빠른 포기는 날 상처입히지 않는다.

 

마지막.

그 어떤 폭격도 견딜 수 있게.

남들보다 먼저 침몰한다.

 

.

.

.

 

 

 

나는 오늘을 예상했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쏟아지는 절망이라니. 흔하디 흔한 클리셰 아니던가. 20살이 되고 맞은 첫눈은 아름다웠다. 상냥할 정도로 포근했고, 나는 바다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을 벌리고, 모든 숨을 토해내자. 나는 이 세상의 전부를 가진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행복하면 살아가는 것이 기대될 텐데. 기대하다 못해, 너무 쉽게 마음을 내어줄 텐데. 연약하기 그지없는 유리로 된 마음을 지키던 가시덩굴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한다. 나의 부정은 보호의 동의어. 사랑하는 이들을 믿는다는 것은, 지독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법. 손을 뻗어 쏟아지는 눈송이를 잡는다. 사르르 녹아 흐르는 그것에 입을 맞춘다. 세상에 남기자. 그것이 이 세상을 지킬 원동력이 되길 바랄 뿐이다. 

 

프롬 파티 때와는 다른 드레스. 새파란 실크로 지어진 드레스는 내게 꼭 맞았다. 이상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화장도. 그들이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도.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은 이다지도 신기한 일이었다. 거울 속의 나는 웃고 있었나, 울고 있었나. 분명한 것은, 나는 분에 넘칠 정도로 기뻐 내가 세운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전부 어겼다. 첫 번째. 세이렌, 너는 분명 이 무대로 하여금 가장 화려하게 데뷔할 거야. 그 말을 믿은 것이었고. 두 번째. 이 행복과 황홀에 젖어 목소리를 내느라 생각과 의심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나는 내일을 감히 꿈꿨고, 어제의 침몰을 잊었다. 네 번째. 포기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래란 기쁨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나는 침몰하고 싶지 않았다. 

폭풍우에 휘말린 아리아 따위,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쏟아지는 비명소리를 듣는다. 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에, 무시했기 때문에. 이렇게 아파서 덜덜 떠는 것이 분명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굳어버린 사고회로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3시간. 3시간 뒤였으면 이 무대는 사람들로 꽉 찼을 것이다. 중앙에 선 나의 스승, 희대의 천재 가수 포르키스는 말 문을 열었겠지.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랜만이네요. 웃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면, 나는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갈 예정이었다. 소개드립니다. 제 제자, 세이렌이에요. 인사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지. 치맛단은 어떻게 들어 올리는 것이었지. 왈츠의 스텝은 무엇이고, 시선의 방향은 어디에 둬야 했지? 쿵. 건물 전체가 흔들리면서, 나는 휘청거림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벽에 금이 가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간간이 건물의 잔해가 떨어지니, 이곳은 아수라장. 혼란이라 칭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테러였다. 범인의 얼굴, 나는 보지 못했다. 범인의 특기, 나는 추측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배워온 규율에 따르는 것이고, 그것을 제하고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첫 무대를 앞두고, 히어로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그제야 콱 막혀 죽어버릴 것 같던 숨통이 트이고, 나는 드디어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머리가 돌아간다. 퇴로는 어딜까. 지금 내가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지. 히어로 답게 행동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더?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저쪽이 대피로예요. 목이 갈라지도록 소리를 쳤다. 돌풍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따끔거리는 눈꺼풀 안 쪽은 울음을 그친 지 오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 사용할 무대는 대피로가 완만하게 뚫려있는 곳이었다. 즉, 혼란만 잠재운다면 도망치는 데에는 최적이라는 소리였다. 비록 예비 히어로, 플레이트를 갓 졸업한 성인에 불과했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가며 사람들을 통솔하던 나는, 문득, 갑작스럽게. 스승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가정하지 못한 최악이었다. 스승님, 이리로 오세요! 하지만 그가 내디딘 지면은 불안정해 보였다. 그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접근한다면 그 잔해에 깔려 내가 죽을지도 모르고, 접근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안전히 이 쪽까지 올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한다. 

구해야 하나, 구하지 말아야 하나. 

 

아주 잠깐의 찰나. 나는 고민했다. 이것은 나의 특기가 변변찮기 때문이오, 나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구한다면 나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구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외면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어디 쉬운가. 최악을 가정하지 않은 나는 질문이 떠오르자마자 마땅히 했어야 할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얼핏 숨을 참은 그 순간에.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을 보았다. 갈라진 지면으로 어긋난 발목을 보았다. 당황한 눈. 금이 간 바닥과 벽. 쏟아지는 잔해. 내가 사랑한 사람의 눈. 아아, 내가 세운 규칙을 어기지만 않았더라도 구했을 지 모를 나의. 사랑하는.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절망적이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마음이 고갈되기라도 한 걸까. 나는 히어로들의 손을 잡는 그 순간까지 건조하게 메마른 낯으로 서 있었다고 했다. 최악을 가정했더라면. 부정적인 생각만을 했다면. 일말의 행복에 심취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내 몫을. 다 해냈더라면. 후회라고 부르기엔 빈약한 그것들이 마음 한 구석에 가라앉는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않은 낯으로 빌런이 체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목소리가 갈라져, 말이 나오질 않아. 나도, 그도, 침몰할 수가 없었다. 이번 테러로 인해 크고 작은 부상자들은 굉장히 많았으나, 플레이트 출신의 한 학생으로 인해 피해가 최소화 되었다며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쏟아부었다. 나는 그들의 인터뷰를 전부 거절하고, 새카만 상복을 꺼냈다. 이 기쁜 소식 와중에도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전설적인 가수, 포르키스가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진동이 끝나질 않는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례식, 참석할 거지?  

 

네.  

 

…저기, 세이렌. 

 

네, 매니저 오빠. 얘기해주세요.  

 

아마 추모 공연이 열릴 거야. 혹시 괜찮다면 네가….

 

네.

노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