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의 우울.
그리하여 우리들은 패배를 인정했다. 더 이상의 발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의미 없는 싸움을 이어가며 괴로워질 바에야, 그저 우리끼리 함께했음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나는 나를 끌어안는 온기에 눈을 감았고, 그리고 우리들은 재앙과 같은 걸음 소리에 맞춰 문을 열었다. 여덟 번째 세상이 밝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헉.
나는 서늘한 감촉에 눈을 떴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무거웠고, 식은땀이 멎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헛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뱉었지만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아 숨쉬기가 몹시 불편했다. 눈만 겨우 굴려 보인 암막 커튼 사이로 햇빛이 선명하게 들이치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어쩌면 조금 늦은 아침. 나는 이것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어째서 일어나지 못했을까. 망상에 잠긴 건 아니었지만, 꼭 익사할 것처럼 목이 답답해 숨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나는 그렇게 침대에 한참이고 묶여있었다. 당연했다. 나는 그런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망상이란 나에게 없던 것이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엉겁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조금의 공포마저 느꼈다. 이대로 깨어날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조금 가지기도 했다. 왜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눈물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코 끝은 시큰해진 지 오래였고, 식은땀에 이불이 젖어간 지도 꽤 됐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어 이 무게에 잠겨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 세계의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너무도 빠르게 시작하면서 나는 거의 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무게를 감당할 바에야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한참 침대에서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누워있다가, 문을 여는 소리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아직까지 안 일어나면 어떡함까! 로젠이었다.
아침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며, 웬일로 이렇게 늦잠을 자나 확인하러 왔다고 했다. 로젠이 들어오자 나는 겨우겨우 목소리가 트여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나 좀 일으켜주면 안 돼? 그 말 한 마디에 로젠은 허겁지겁 나의 기상을 도왔다. 로젠의 손에 의지해 겨우겨우 일어난 나는 버거운 호흡을 한참이고 몰아쉬었다. 폐부를 찌르는 습한 공기가 짭짤했다. 로젠은 침대 맡에 앉아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괜찮아.' 라며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이대로 내려가면 로젠은 '페르네 누나, 좀 아픈 것 같슴다!!' 라며 집을 떠들썩하게 하겠지. 나는 눈을 느리게 굴리며 로젠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아서, '괜찮아.'라고 한 번 더 강조했다.
이불을 걷고, 나는 땅에 발을 내렸다. 이제 나는 발을 질질 끌지 않는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오른 발로는 걷기가 힘들어서, 나는 집이 지어지는 내내 발을 끌었다. 수술로 고칠 수도 없고, 이어 붙일 수도 없었으며, 자연 회복도 되지 않아 보조 장치가 없는 이상 평생 그렇게 외발로 살아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집이 다 지어질 때쯤 모두가 선물이라며 보조 장치를 채워줘, 이제 걷고 뛰는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었다. 조만간 의족으로 바꿀까, 넌지시 이야기했더니. 모두가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보조 장치에 적응하는 것도 제법 오래 걸렸는데, 의족에는 얼마나 오래 걸릴까? 나는 기우뚱거릴 것 같은 몸을 바로 세워 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른쪽 발목이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팠다. 로젠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태연한 얼굴로 고갯짓 했다. '뭐해? 빨리 내려가야지.'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을 허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 전부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제약이 많고, 위험했으니까. 다만 시내에 나가기로 한 일원 중에 '나'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으로, 이런 마음으로 괜찮을까? 빌런으로 있었던 시간이 있었고, 사건사고가 벌어졌으니 우리들은 아주 조용히 다녀와야만 했다. 웬만하면 문을 꼭 닫고 조용히 사는 게 좋다지만, 우리에게도 이데아를 볼 권리가 있었다. 그게 재앙으로 다 허물어져 뼈만 남은 세계라 해도, 그게 우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거대한 처형대와 같은 몰골이라 해도. 나는 오늘을 제법 기대했지만, 이런 마음으로 조용히 다녀오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어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돌려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거야 다른 사람들도 기대했으니 말이다. 당연했다. 우리들은 이데아에서 살았지만, 이데아보다는 바벨탑에서 지낸 시간이 길었으니 말이다. 이번 외출은 어떤 히어로가 도와준댔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식당은 조금 넓었다. 13명을 수용하기 위해 크게 설계한 탓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토스트들이 늘어서고 있었다. 13명의 몫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제야 깨달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무척이나 힘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오나, 그러니까, 엄마는 힘든 내색을 하나 보이지 않고 매일같이 13인분의 아침을 준비해주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아직 모두가 앉지 않는 13명의 테이블을 빤히 바라보다가, 나는 테이블 중앙에 놓인 퍽퍽한 모닝빵을 집어 들었다. 로젠, 이 귀여운 동생이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기 전에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엑, 누나, 라는 외마디 비명을 모른 체하며 그의 입에 모닝빵을 쑤셔 넣자, 어서 앉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 앉아 딸기잼의 뚜껑을 열었다. 적적하지 말라고 틀어놓은 TV에서는 한 달 전 빌런과 히어로들의 격돌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달 전, 이데아의 에서 빌런과 히어로들이 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빌런이란 존재를 수습하기 위해 레비아탄 데카라비아를 포함한 12명의 히어로를 파견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히어로들의 승리, 빌런들은 전부 사망했다. 이후 빌런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라고 하며, 해당 과정을 자세하게 듣기 위해 당시 사건에 파견되었던 대표 레비아탄 데카라비아의 브리핑이 있겠다고 했다. 나는 그 시시하기 그지없는 뉴스에서 귀를 닫으며, 딸기잼을 토스트에 펴 발랐다. 이 딸기잼은 언니들과 오빠들, 그리고 엄마까지 달라붙어 함께 노력해준 내 첫 완성품이었다. 나는 내가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요리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망상으로 만든 요리는 요리 경험으로 카운트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는 바삭한 소리를 내면서 입 안에서 부스러진다. 까끌까끌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을 지배했고, 나는 그 맛을 퍽 좋아하지만 오늘따라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아침의 일 - 꿈 - 에 대해 생각하다 죽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기계처럼 그것을 씹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식당에 전부 모이고, 하나 둘 제 자리를 찾아 앉으면서 달그락거리는 식기의 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단 한 자리만 비어있는 테이블은 제법 떠들썩했고, 나는 그 분위기에 맞춰 입을 움직이고 눈을 굴렸다.
그렇게 토스트를 반 쯤 먹었을까. 마지막 지각생이 방문을 열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자, 가족들은 저마다 웃으며 핀잔을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 빌런 기지에 있을 때의 나날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단탈리안은 그저 웃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나는 그를 물끄럼 바라봤다. 우리들의 보스였던 그 사람은 죽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꿈을 형상화하다 보니, 속이 미슥거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잼통을 단탈리안에게 밀어주었다.
가족이 다 모여 먹는 아침은 퍽 조촐했는데, 빌런 기지에서의 날보다 활기차다는 생각을 했다. 피 냄새와 먼지, 고함소리나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봐라, 지금도 저 빈자리를 뒤늦게나마 채워주는 이가 있지 않았나. 그리하여 우리들의 의자는 단 한 사람도 비지 않고 자리를 찾아가지 않았나. 그곳에서의 우리는 남이었고, 저마다 분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존재했다. 누군가가 없으면 외면하고 찾지 않았으며,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히어로의 고함 소리에 발맞춰 비명을 질렀고, 웃음을 터트렸으나 누구도 웃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문득 보스, 그러니까 이제는 우리들의 오빠에 불과한 에트르, 단탈리안에게 묻고 싶었다. 그 당시의 당신은 우리를 모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대체 무슨 생각을….
아. 나는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목구멍으로 토스트가 올라오기 전에 반사적으로 남은 한 조각을 입에 욱여넣었다. 잼도 바르지 않은 채였다. 곁눈질로 식당에 온 모두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허겁지겁 그것을 입에 넣었다.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입천장을 긁고 지나갔지만, 나는 아픔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전투적으로 씹어 삼키기 바빴다. 다행스럽게도 로젠은 모닝빵으로 입을 막힌 뒤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에 벌어지고 말았다. '페르네.' 잭 오빠는 모두를 잘 안아준다. 그리고 잘 신경 써준다. 그 다정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순간에는 곤란해지고 만다. 나는 고개를 겨우겨우 들어 잭을 바라보았다. '어디 아파?'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나는 억지로 입에 남은 토스트 한 입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입 꼬리를 올렸다. 거짓말은 능숙하게, 헛소리는 태연하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마.'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불신의 눈빛이 슬쩍 새어 나온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간파한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들은 어쩔 때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덧붙였다. '조금 졸려서 그래요.' 잭 오빠와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의 서늘했던 손이 떠오른다. 언니나 오빠들을 번쩍 들고 빙글빙글 돌던 그는, 그 모습처럼 마지막을 맞이했다. 다만 손이 아주 많이 차가워졌을 뿐이었다. 조금 더 자지 않겠느냐 누가 이야기해준 것도 같았지만, 나는 사랑하는 나의 에트르가 모조리 죽어 짓밟히는 꿈을 꿨기 때문에 침대 근처에 가고 싶지도 않아 정중히 거절했다. 누군가 나를 더 추궁하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의 대상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TV에선 레비아탄이 나와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빌런 기지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 고함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박살나는 소리도 들렸다. 뒤늦게 내가 울었다. 목숨을 구걸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의 자비를 구걸했다. 내 목숨에 대한 자비가 아닌, 내 가족에 대한 자비를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자비를 바라기엔 우리 스스로도 너무 먼 길을 돌아왔었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우리가 그만큼이나 돌아갔으나 이 정도의 자비조차 바랄 수 없는 '가해자'였기만 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고, 매정하게도 칼날이 드리워 우리들은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탄환에 몸이 밀리고, 비에 젖어 옷이 무거워졌다. 가장 먼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진 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나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참극을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본 '빌런'이었다. 울고 있었고, 괴로웠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고함을 치기도 했고, 서늘하게 식은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싫다고 부정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때에 숨을 잘 쉬지 못했다. 어차피 죽는다면 마지막까지 함께 있자고들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였다. 사랑을 속삭이면서, 너희를 만난 건 최고의 행운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같은 날에 죽었지만, 애석하게도 한 시에 죽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비극이었다. 나만 기억하고 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비극. 그렇게 마지막 에트르가 죽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자꾸만 그 꿈의 잔상에 좀 먹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최악'이었고, '꿈'에 불과했는데.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있고, 우리는 이렇게나 행복한데. 왜 자꾸, 나는, 걸음을, 내딛을 수 없는 걸까?
망상을 통제하는 건 너무 쉬웠는데, 이제와서 그 꿈이 버거워졌다. 발목을 붙잡고, 자국을 남기며 질질 늘어지고 만다.
전장에서 도망친 지도 한 달 째인데, 왜 하필 오늘 그런 꿈을 꿨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토끼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페르네?' 누군가 멈춰있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걱정하는 음성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기폭제가 되어 나는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들었다. TV에서는 레비아탄의 브리핑이 끝나고, 현장에 참여한 히어로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변기의 커버를 들어 올리고 속내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내뱉었다. 욱, 우웩,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역겨운 소리였다. 속이 쓰리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일 것이며,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토끼를 참지 못한 눈물이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누군가 급하게 달려 나와 등을 두들겨줬지만, 안타깝게도 그 다정은 나를 진정시켜주지 못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겨우 도망쳤다. 드디어 바벨탑에서 벗어났고 그것에게 종속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 기이한 꿈은 이제와 내 발목을 잡는 걸까? 나는 그 풍경이 이상할 정도로 생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은,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보스도, 엄마도, 언니들과 오빠들, 동생들마저 전부 다. 끈적한 피로 범벅이 되어 진흙탕에 처박혀버린 풍경은 전장에 서 있으면서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평화의 시간, 이 행복한 나날의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쓰러질 것처럼 헐떡대는 나를 수습한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급하게 물을 틀어 주변을 수습하고, 수건을 들고 와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아샤의 얼굴이 보였다. 아, 오빠. 나는 말을 웅얼거리며 아샤를 바라보았다. 아샤는 조금 젖었지만 분명하게 돌아왔었다. 상처도 조금 있었지만, 그건 상처라고 취급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쉬쉬하며 그를 반겼다. 그래, 반겼다. 어서 오라는 말도 했다. 고작 유품이 담긴 케이스를 끌어안고 울지 않았단 말이다…. 나는 눈동자가 뒤집히고 세계의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내 얼굴을 닦아주며 걱정스럽고 소란스럽게 말을 거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세계의 섭리에 몸을 맡겼다. 얼굴이 붙잡혀 있기 때문에 머리가 깨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대로 팔과 다리에 힘이 쭉 풀려 나는 눈을 감았다. 페르네, 라고 누군가 비명 치듯 소리를 지른 것 같지만, 그것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기이한 꿈과 행복한 나날의 괴리감만큼 깊어진 심연 속으로 누군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오후에 내가 눈을 떴다고 했다. 엔조가 걱정스럽게 달려와 내 얼굴을 쓸어주었다. 창백하고 차갑다고 했다. 더글라스도 한 소리를 얹길, 그 때의 나는 거의 죽은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괜찮아. 진짜 미안.'이라는 말을 했지만, 엔조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허겁지겁 엄마와 다른 이들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더글라스는 정말이냐며 옆에서 연신 말을 걸어주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단순히 나쁜 악몽을 꾼 것뿐이었다. 더글라스는 그때 시체로 돌아왔지만, 지금 이 곳의 더글라스는 분명히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래, 아주 나쁜 악몽을 꾼 것뿐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몰려들어오는 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꼭 우리들의 집을 부수던 히어로들의 것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조금 더 다정했기 때문에 버텨낼 수 있었다. 테일러 언니가 내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잡아줬다. 따듯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걱정했었는지,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늘 나갈 수 있겠냐고. 나는 잠깐 고민했다. 다들 나가지 말라고 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족인데 걱정을 이 이상 더 시킬 수 없지. 어쩔 수 없으려나, 기대했는데. 나는 테일러 언니의 손등을 남는 손으로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갔다 올 거야.'
결론적으로 고집 싸움의 승자는 나였다. 아무리 엄마와 보스가 이야기해도, 언니와 오빠가 걱정을 해도 내 고집을 꺾기란 불가능했다. 고작 악몽 따위에 패배해 오늘의 외출을 포기한다는 것은 내 평생 동안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데아의 시작부터 끝까지 눈으로 담고 싶었다. 그게 다 허물어져가는 뱀의 껍질이라고 해도, 바스러지는 뼈다귀의 무덤이라고 해도 말이다. 내 세상은 너무 좁았고, 인생은 너무 짧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늘과 내일에 대해, 나는 조금이라도 더 분명히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나는 옷을 꺼내 입으면서 쓰린 속을 부여잡았다. 꿈만 아니었다면 지금 쯤 예쁜 옷을 입고 싶어 옷 여러 벌을 펼쳐두고 고민했을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오늘 고른 옷은 노아 오빠가 골라준 옷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무난하게 어우러진 원피스는 내가 입기에도 적절했고, 바깥에 나가기에도 과하지가 않았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노아 오빠를 끌어안고 한참을 매달렸는데, 어쩐지 오빠는 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오빠가 아니라. 꿈속의 오빠가 말이다. 나는 노아 오빠를 한참 바라보다가, 넌지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 마중 나와줘야 해. 오빠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무척이나 다정한 웃음이었다.
나는 모자를 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멜랑콜리와 셀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 둘이 동행할 예정인가보다. 아무래도 우리들은 빌런이었고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랐다. 은밀하게 조율해본 결과, 우리들의 외출에 히어로들이 동행하면 되지 않겠냐는 결론이 나왔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그들은 착실하게 와서, 착실하게 함께 다녔고, 착실하게 퇴근했다고 했다. 이건 레비아탄의 자비인 걸까? 나는 모를 일이다. 나는 멜랑콜리와 셀리나의 사이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놀렸다. 발목은 괜찮으냐 묻는 멜랑콜리의 말에 보조 장치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답했다. 우리들은 천천히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예상했던대로, 이데아는 고여 썩어가는 세계였다. 이 쪽으로도 바다, 저 쪽으로도 바다. 도망칠 수 없는 뜬구름의 섬, 마치 거대한 기계장치의 무대. 나는 어딘가 황폐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쓸쓸한 시내의 중심부를 돌아다녔다. 도중에는 전단지 따위도 떨어져 있었고, 신문 같은 것도 버려져 있었다. 한 부를 주워 읽으니, 이디스와의 인터뷰가 나와 있기도 했다. 신문의 끝부분이 젖어있어서, 어쩐지 정말 그가 읽고 간 것만 같았다. 그는 아샤의 유품이 담긴 케이스를 던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샤에게 무슨 기도를 했을까? 나는 그를 믿지 않는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치사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여기 있는데, 시체는 아주 나중에 돌려받았다. …그 사건을 곱씹으니 속이 쓰렸다. 사실 사건이랄 것도 없는 꿈인데, 왜 감정은 요동치는 걸까? 속이 상해 신문을 다시 버리려다가 셀리나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있잖아, 이디스가 말이야. 내 말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셀리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볼 일부터 끝내자고 이야기했다. 하긴, 오늘 나온 이유는 아들라이가 주문해준 양산을 받기 위해서긴 했다. 김 빠진 표정으로 셀리나를 노려보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서 걸었다. 얄미움이 느껴져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당황스럽다는 듯 내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지만, 셀리나의 손가락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프지도 않았다. 멜랑콜리가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걸었다. 이 시내는 우리에게 다정하지 않았지만, 계속 걸을 만큼의 여유를 주었다. 참으로 조용한 시내였다. 내가 기대한 것만큼 왁자지껄하고 소란스러운 공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아침에 단탈리안이 늦잠을 잔 것, 리오나가 차려준 아침은 늘 근사하고 대단했다는 것, 레비아탄을 포함한 히어로들은 사실 지금 눈 뜨고 살기 힘들 정도로 바쁘다는 것, 이데아는 오늘도 평화롭다는 것…. 멜랑콜리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바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금세 눈치챘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세계의 사과를 받을 지 모르겠다. 그게 탁상공론에 불과한 희망이라고 해도 말이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나는 으슥하고 어두운 가게들의 골목으로 향했다. 아들라이가 주문해준 양산은, 아들라이가 쓰는 것과 비슷하되 다른 것이었다. 아들라이의 것을 갖고 싶다고 하자, 비슷한 것을 사주겠노라 이야기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을 보내준 것을 통해 추정하건대,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주문해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가게에 들어가기 망설였다. 들어가도 될까, 가 이유였다. 얼굴을 알아채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은 빌런인 이상, 죽은 사람의 신분을 가진 이상 갖지 않을 수가 없는 불안이었다.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셀리나가 대신하여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고요한 골목의 내부를 곁눈질로 흘겨봤다. 꾹 눌러쓴 모자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살아남은 건 기쁘지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기쁘지만. 이런 부자유에 우리는 얼마나의 인생을 억압당할까. 나는 새삼스럽게 그것이 궁금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동생들이 학교에 가는 걸 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찾아보고 싶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래서 끝이 없나 보다. 언니와 오빠들이 누군가와 걸어 나가는 것도 보고 싶었고, 엄마와 아빠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해내는 것도 보고 싶었다. 살아남는다면, 나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리라 생각했는데…. 상념 사이로, 셀리나가 나에게 양산을 내밀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능숙하게 펼쳐냈다. 흰색의 양산, 그리고 양산의 천을 가득 메운 자수들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보였다. 꼭 내가 지냈던 빌런 기지와 비슷한 건물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손을 잡고 피를 흘렸다. 우리들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자고 이야기했다. 피가 흐르고, 구둣발은 무거웠다.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아프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이미 감각은 죽은 지 오래되어, 아프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어가는 손의 감촉과 말라비틀어진 눈물의 자국에 대해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나? 꿈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복잡한 마음이 들 필요가 있었나? 나는 모르는 사이 양산 너머의 건물을 한참이고 지켜봤고, 멜랑콜리가 이상함을 느껴 내 얼굴을 바라보니 나는 울고 있었다고 했다. 왜 우는지, 왜 이제야 꿰뚫렸던 모든 곳이 아픈지. 나는 단 하나의 이유도 알지 못하고, 외출을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말았다.
멜랑콜리랑 셀리나와 헤어졌다. 아들라이가 주문해준 양산은 펼친 지 5분도 되지 않아 품 안에만 자리하게 되었다. 히어로들과 관련된 뉴스가 시내의 거대한 전광판에서 흘러나왔지만, 나는 발을 삐걱삐걱 내세워 걷기 바빴기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집 근처에서 마중을 나와 준 노아 오빠는 빨갛게 물든 내 눈을 보고 걱정스럽게 자켓을 걸쳐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화를 내려나, 싶었는데. 오빠는 다행스럽게도 묻지 않아 주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참는 표정이었지만, 나에겐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문제는 집에 들어가서인데, 이 빨간 눈을 식히지 않으면 어떤 추궁을 들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참이나 바람을 맞으며 시큰거리던 코를 식혔다. 원래라면 저녁 먹기 전에 집에 들어갔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내 눈이 쉽게 식지 않아, 노아 오빠는 저녁까지 거른 채 내 옆을 지켜줘야만 했다. 들어가라고 이야기했지만, 오빠는 나 혼자 두기 걱정된다나, 절대 안 된다나.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닷가를 한참 걸었고, 모래사장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나는 모래의 색깔이 붉은 색인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마주한 바다의 색깔은 푸르렀고, 모래는 황금처럼 반짝여서. 내 상상보다 현실이 더 아름다움을 인정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집에 돌아온 순간. 내 걱정 아닌 걱정이 엿보이는 수 많은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막힌 탓이었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온기를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의 감정이 드러나고 있는 채였다. 우리들의 집은 허름하게 무너진 기지가 아니었고, 우리들이 맞잡은 손은 더 이상 식어가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무겁지도 않았다. 비가 쏟아지지도 않았고,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표정이 왜 그러냐는 물음에 나는 답하지 못했다. 미스티가 걱정스럽게 꾹 눌러쓴 내 모자를 벗겨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왜 울었느냐 물으면, 도저히 답할 수가 없는 감정들과 기억들에 익사하고 있기 때문이라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왜', '어째서', '갑자기'의 말을 쓰지 않았다. 나는 언니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그냥 서러웠다. 너무 괴로울 정도로, 억울했다.
세상은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이만큼의 다정을, 이만큼의 사랑을 가진 이들을. 왜 세계는 스스로를 위해 그 엉겁의 굴레로 밀어 넣었어야 했을까…? 나는 이제 꿈의 내용을 온전하게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아 나는 아주 많이 억울했고, 아주 많이 슬퍼졌다. 숨을 들이키고 내뱉는 모든 행위가 아파서, 나는 가족들의 위로를 아주 오랜 시간 받았다. 나와 오빠를 기다리던 저녁밥이 식어가고, 우리들은 오늘 다 함께 거실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내가 고집을 피운 탓이었다. 너무 울고 있는 내가 걱정된 그들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고집을 들어주었다. 나는 아픈 눈을 느리게 감으면서, 천천히 남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가족의 품이었다. 이 세계의 나도 행복할 수 있구나. 나는, 죽어도 행복했고, 살아남게되어도 행복해지는구나. 나는 내가 세상에 명계를 불러오는 줄 알았더니, 그리하여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아등바등 애쓴 줄 알았더니. 그저 평범하게, 구원받은 것뿐이었다.
TV에서는 사건에 참여했던 히어로들을 앞장 세워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바벨의 피해자들을 그리는 것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청각 속, 우리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실험체의 번호가 아닌, 우리가 버렸던 이름이었다. 레비아탄이 입을 열고, 장례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우리는 TV를 껐고, 손을 잡았다. 그걸로 되는 일이라며 우리들은 그렇게 잠에 들기로 했다.
구원의 색을 닮은 아흐레의 아침이 발밑까지 들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