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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_03_004_567_세이렌.

Queen  2022. 3. 15. 15:17

그래,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겠어. 히어로다운 생각을 했구나, 솔직히 감탄스럽다면 감탄스러워. F등급에 대한 혐오를 없앤다거나, 무특기자에 대한 배척을 없앤다거나. 요즘에는 혼혈 차별이 두드러지고 있지, 그런 것을 해소한다거나. 응, 꼭 히어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할 법한 생각이구나.  근데 나는 추천하지 않아. 네 알량한 동정심을 베풀고, 그로 인해 네가 만족하고 나서는 생각해본 적 있니? 없겠지. 너는 지금 이 상황의 모면만을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 얘기하면 바꿀 수 있어. 지금 활동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야. 나는 그 생각을 가장 바보 같은 것이라고 지칭해. 지금을 바꾸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건 상황을 벗어나는 거지, 변화가 아니야. 동정을 베풀 거라면, 그 이후까지를 생각해야지. 그 자리에서 아무리 가해자들을 나무라도, 결국 뒤돌아서면 그들과 살아가는 건 피해자야. 너는 히어로라는 이름으로 멀리 떠나버리겠고, 남아있는 피해자들은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치다 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겠지. 나는 이 상황의 원인을 동정이라 불러. 그래, 히어로라면 가져 마땅할 그 감정이 이 모든 악순환의 원인이야.

 

네가 세상을 바꾸길 원한다면 행동 그 이후를 생각해야지.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떻게 분리할 지, 가해자들의 처벌은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그게 어디, 네 수준에서 되는 일이니? 네가 주장한다고 고려되는 사항이겠냐고. 가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냥 포기해. 눈 감고, 귀 막고, 그렇게 살아. 어쭙잖은 동정과 정의를 내세워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 말귀를 못 알아듣네. 한 가지 조언을 해줄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했고, 그 결과 내 생각과 세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어. 내가 입학했을 때, 내 선배 중 한 사람은 F등급이었는데. 그 사람의 SOS는 그냥 폭풍우 속에서 침몰해버렸단다. 우리들은 그 선배를 도우려고 애를 썼지.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있는 힘껏 글로 썼어. 나는 그것을 무의미한 행동이라 지칭했는데. 정말 무의미한 행동이 됐어. 가해자들은 이제 히어로가 되겠지. 우리들은 그 사람들에게 찍힌 채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거야. 우리라고 평탄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데, 그 선배는 오죽했을까? 확신하건대, 우리가 개입하기 전보다 심해지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을 걸. 

 

그게 우리의 한계야. 세상이란 그런 거고.

 

그래서, 정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누군가를 동정하고, 구하고 싶다면. 훗날을 생각하고, 최악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돼. 순간의 감정을 내세워서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러봤자. 바뀌는 건 무엇이 있어?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의 말도, 반복되는 희망고문에 불과하단다. 절망이 커지면 그 어떤 정의의 논리도, 동정의 손길도 통하지 않아. 침몰해버린 배가 떠오르는 거 봤니. 나는 본 적이 없어. …물론, 불의를 보고 아예 포기하라는 건 아니야. 순응하고, 절망하고, 그것에 고개 숙이라는 뜻은 아니야. 물론이지, 나도 히어로를 지망하는데 그런 것을 이야기할까. 하지만 네가 그 너머를 생각할 수 없고, 그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었어. 너로 인해 몇 명이 더 절망해야 그때 깨달을래? 선배로써 해주는 조언이야, 세심하게 새겨들어주면 좋겠어. … 너무 꼰대 같니?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지. 

 

분하다는 얼굴이구나. 그래, 내 이야기가 길었지. 그러면 짧게 요약해줄게. 너는 당장만 생각하고, 어제와 오늘,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어. 너처럼 알량한 동정심의 소유자를 몇 명이나 만났는데. 히어로가 되어봤자겠지. …하하, 대화의 진척이 없구나. 너무 울지 말아. 자, 여기 손수건. 난 이만 가볼게. 그 동정심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지 잘 해봐. 네가 구했다고 생각한 침몰의 잔해들에게 돌 맞지 말고. 괜한 희망을 내어줘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포기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