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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게.

Queen  2022. 3. 11. 19:06

 

세이렌의 사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단순하다. 생각이었다. 그 어떤 불행과 고난을 겪은 것도 아닌데, 그냥 이런 마음을 타고난 사람의 결론이 세이렌이었다. 어째서 꿈을 꾸지 않는가. 그것은 실패가 두려워서였다. 어째서 희망을 갖지 않는가? 그것은 절망이 무서워서였다. 세이렌은 살짝 갈무리된 서리의 미소를 바라보면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물샘은 다시 눈물이 그득그득 고이기 시작하는데, 그냥. 어째서일까? 흘리고 싶지 않아 졌다. 그뿐이었다. 만약 내가 희망을 가진다면 이 거리를 좁힐 수 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 세이렌은 살짝 새어 나온 의문을 바로 접어버린다. 아니, 불가능해. 희망을 갖는다 한들 거리는 좁혀지지 않아. 그것이 현실을 직면하고자 애쓰는 나와,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너의 차이니까. 세이렌은 속으로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은 아니지만, 기쁨의 것은 아니었다. 

 

타인을 위해 상처입을 수 있는 용기. 세이렌은 그것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여기고 있다. 즉, 세이렌은. 단 한순간도 서리의 사상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경외롭다면 경외 로울 뿐이었다. 그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나, 그런 사상에 몸을 던질 각오를 했을까. 그것은 작은 의문이었으나. 결론 앞에서는 무용지물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감상과 이성은 다르다. 세이렌은 멋대로 불가능의 낙인을 찾아낸다.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건 세상에 많지 않다.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게 긍정적인 상황으로 직결되건, 그 반대의 상황으로 이어지건. 사람은 결국 책임을 분산시켜야 한다. 어깨가 무겁다면, 너무 빨리 주저앉게 되니까. 그리고 그 길은 그대로 닫히겠지. 누군가가 도와준다 한들 한계는 존재할 테고. 어쩌면 그 누군가가 없는 세상이 올 수도 있고. 나는 히어로의 청렴함을 믿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의 결론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서리야.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야 해. 타인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순간. 점점 깎이기 시작한 무언가가 너를 상처 입힐 거야.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타인의 기분을 고려하면서. 물론, 살아감에 있어 그러한 상호작용은 당연한 것이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가 비굴해짐을 느끼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사람은 침몰하는 거야. 사람으로 인해. 

 

 

세이렌은 입을 연다.

너는 긍정적인 사람이야.

건조한 목소리가 새어나옴에 따라, 세이렌은 어쩐지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히어로를 지망하는 거겠지? 하지만 서리야, 대가를 바라도록 해. 훗날 지치게 되면, 네 선의가 너를 도와주겠지. 하지만 그것의 한계는 명백해. 사람 간의 호의는 생각보다 무한히 넓지만, 그렇다고 단단한 게 아니야. 누구나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타인을 내내 지지해줄 수 있겠어.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너 같지가 않아. 너를 닮은 사람이 존재할지언정, 네가 한 만큼을 내어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해. 그러니 차라리 빚을 만들어. 대가를 요구하고, 훗날의 너를 지지해줄 호의를 쟁취해. 말의 무게를 알고 있다면, 보답의 무게도 알아야만 해. 네 모든 선택은 헌신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너는, 그것들을 받아내야만 해. 선한 사람이 보답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끝내는 이야기는 지긋지긋해. 너무 흔해 빠졌잖아. 

 

어떤 순간에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도 계속해야 할 때가 있어. 내가 살아온 방식이 정말 틀린 거라면, 나 역시 바꿔야 겠지.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어. 다만, 나는 여태까지의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은 언제나 여러 갈래의 길을 걷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는 것은 단 한 개야.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그리고 이 불필요한 언쟁을 통해 입 바깥으로 내뱉는 건, 너희들이 걱정돼서고. 나만큼의 대비를 하지 않는 호의가 어떻게 옳음으로 직결되겠어. 너덜너덜해지고, 배신당하고, 결국 침몰해버릴 뿐인 걸. 너는 불구의 꿈을 꾸고 있으니까. 후회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도, 후회할지 모르는 선택을 했고. 무력감이 두렵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혹사하게 될 거야. 세상은 네 노력보다 비대하다는 걸 알면서, 타계책 하나를 생각하지 않는 모습은. 그래, 내게는 미련이야. 그러니 네가 바라는 것을 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서리야. 그걸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허리를 천천히 피면서, 세이렌의 손끝이 발 끝에 닿는다. 변화 없이 건조한 낯은 담담한 소리였다. 서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제법 매끄럽게 다음 동작을 이어나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플레이트의 입학자, 당당하게 A등급의 이름을 걸고 들어온 사람. 이 정도도 못해낸다면, 실격이겠지. 중얼거림이 작게 이어지고, 세이렌의 모자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 뚝 떨어진다. 네 편이 되어준다고 해도, 잘 해낼 자신이 없어. 나는 널 지지해주지 못해. 그건 너무 긍정적인 일이고, 실패를 고려하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널 말려줄 수는 있겠지. 정신 차리라며 다그칠 수도 있을 거야. 이런 성격으로 네가 틀리지 않았다고 해줄 수는 없지만. 이런 성격이기에 네가 옳았음을 증명해줄 수는 있겠지. 그것으로 상관없다면.

 

그렇게 해줄게. 세이렌이 동작을 멈추고, 서라를 바라본다. 그게 전부인 동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