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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

Queen  2021. 4. 6. 13:37

어떤 세계의 우리는 에트르의 이름을 달고 도망칠 수도 있었을 터다.

 

우리들은 이데아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쭉 달렸다. 발이 부르트기도 했고, 무릎이 망가지기도 했다. 누군가는 걷지 못해 넘어지고, 누군가는 발을 질질 끌어 부축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즐거웠노라 이야기하며 웃음을 꺼트리지 않았다. 누구 하나 낙오되지도 않았다. 히어로들의 고함소리도, 상처에서 풍기는 피 냄새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되어, 우리들은 눈 안에 가득 담기는 찬란의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하루, 이틀, 우리들은 여전히 처음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마지막인 것처럼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낭만적일 만큼 반짝이는 은하수의 밤 아래서, 우리들은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그런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제법 시간을 들여 바다에 도착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신발을 벗어던지고 바다로 달려들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충동이었고, 누구 하나 구속된 것 없이 자유롭게 바다 위를 거닐었다. 햇빛을 투명하게 머금은 바다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져 물어갈 듯 새빨갛게 타오르는 해는 우리가 여태껏 봐온 그 어떤 노을보다도 강렬했다. 우리들은 손가락을 차갑게 만드는 물방울의 개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허공에 흩뿌리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짠맛에 열이 올라 상기된 표정들에서 우리들은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그 표정을 한참이고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우리가 바벨탑에서 정말로 도망쳤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바벨탑에서 도망친 지 아주 오래되었지. 12월 25일, 잊을 수 없는 그 날. 인간사의 가장 큰 획을 그은 신의 존재가 증명된 그 날에 우리들은 거리로 달려나왔다. 저마다 형편없는 몰골로, 삶을 구걸하면서 상처 입은 맨 발을 내디뎠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벨탑에게 아주 오랫동안의 작별을 고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언제나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이데아의 멸망을 바랐고, 바벨탑을 증오했으니 말이다. 누구 하나 온전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지만, 너덜거리는 심장을 깨끗하게 비워 우리들만의, 우리들끼리의 감정을 새로 집어넣으니.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모래사장에 새 이름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은 파도가 밀려들어옴에 금방 사라질 테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읽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괜찮다고 이야기하며 바닷물에서 발을 빼내었다. 

 

밤이 몰려오고, 우리들은 불을 피우기로 결정했다. 젖어버린 발이 시렸지만, 사실 그 누구 하나 추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별다른 겉옷이나 담요 역시 없었지만, 우리들은 그저 서로의 손을 잡고 고개를 기대는 것으로 작은 불의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이에 모래사장은 깨끗해졌고, 존재를 적어내린 단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나 기록 따위가 아니었다. 결국 죽어버릴 필멸자들에겐, 글씨나 책 따위로 남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로 하였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힐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정말로 모든 감정을 내버릴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아주 멀리로 도망쳤다.

가족의 손을 잡고, 이데아 저 너머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