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가의 심장은 무슨 색을 띄는가.
비가 내렸다. 바닥에는 진흙이 고이고 비린 피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젠 움직이지 않는 시체 한 구의 팔을 잡아 들었다. 얘는 제 언니로 하고 싶어요. 조직원들이 혀를 내두르며 또 시작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전 오늘 오빠랑 돌아갈 거니까 안 태워주셔도 돼요. 허공을 쥐는 나의 손을 본 건지, 한 조직원은 욕을 내뱉었다. 보스에게 말해서 내쫓든 해야지, 라는 말이 귓가에 닿았으니 다정한 나의 망상은 내 귀를 덮어 듣지 못하게끔 해주었다. 나는 순순히 웃으며 등을 돌려 떠나가는 조직원들을 봤다. 그들은 동료고 전우였지만 동시에 남이었다. 가족이 될 수 없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에 경멸이 뚝 고여 떨어진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허공을 쥐었고, 천천히 잠기기 시작했다. 시체들의 진흙탕 속 고고하게 서 있는 단 한 그루의 석류나무는 나였다. 뿌리가 썩어도, 열매를 맺지 못해도. 돌풍에 나무껍질이 박살 나도 꽃만큼은 피워낸 나무. 혹은, 미치광이. 그게 나. 페르세포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발로 빙글빙글 춤을 췄다. 쏟아지는 비를 꽃잎이라 생각하니, 정말로 어두침침했던 장마날의 오늘이 노란빛 만발한 봄날로 변했다. 집중하지 않아 얼굴이 무너진 나의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며 박수를 쳐주었고 저마다 입을 모아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나는 그 풍경이 제법 좋아, 한없이 웃으며 발을 움직였다. 시체가 차여도, 비에 전신이 흠뻑 젖어도 개의치 않았다. 이 곳은 나의 세상, 나의 이데아, 나의 유토피아.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나에게만 다정한 세상…. 예전부터 함께해온 망상은 천천히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굳이 내가 집중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바벨의 나날은 나에게 괴롭지만은 않았다. 매 순간 죽을 뻔 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매일 같이 괴롭고 아팠지만,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잊고 바꾸었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온몸이 구속당하고, 목이 졸리고, 이상한 약물을 투여당하고, 살이 찢어지고, 잘리고, 이어 붙이고, 다시 자르고…. 나는 눈을 아주 많이 깜빡였다. 엘리자벳이나 스킬라 따위도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먹고 살 수는 있어서. 죽어도 환상에 잠겨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독한 풍경의 현실은 흰색 독방으로 인해 차단되었다.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천장 위로 나는 아주 많은 하늘을 그렸다. 그래서 괜찮았다. 몸과 정신은 다른 것이었고, 나는 정신만 행복하면 그만인 아주 단순한 사람이었다. 갖고 싶은 게 참 많았고, 가질 수 없는 게 참 많았다. 불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행복했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가짜임을 자각하게 되는 건 아주 사소한 계기다. 차라리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슬프진 않았을 텐데. 누군가와 맞닿은 건 처음이었다. 안아줘서 기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될 수 있는대로 투정 부리고 싶었고, 할 수 있는 만큼 사랑받으며 잠을 자고 싶었다. 조금 배가 고파도 좋았고, 조금 자지 못해도 좋았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와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 때의 나는 명계의 까마귀, 혹은 페르세포네를 바라봤다. 이게 현실이냐 묻는 나의 말에, 까마귀는 그래, 드디어 현실이야.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나의 손에 남아있는 온기를 너무 많이 곱씹으면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외로웠고, 힘들었다. 혼자 살기 버거운 세상이었다. 극단적으로 절벽의 끝까지 발을 내딛어야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숨이 막혔고, 피곤한 세상이라며 한탄을 터트려야 했고…. 그래서 가족이 갖고 싶었다. 나는 커다란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둘 째라는 설정을 덧그렸다. 커다란 집, 풍족한 먹을거리, 따듯한 이불속에서 동생들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다 보면. 너무 늦게 자지 말라는 오빠와 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부모님의 양 뺨에 입을 맞추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니 내 마음이 풍족해졌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거짓이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나는 하루의 행복이 소중했기 때문에, 그저 꿈, 그저 한심한 망상이어도 발을 딛고 잠겨버릴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괴로운 오늘이었다. 이렇게나 슬픈 하루였다. 그래서 망상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살아갔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기에 나는 무서웠다. 아주 많은 것이 무서웠고, 아주 많은 것이 두려웠다. 나는 너무 어렸고, 세상은 너무 거대했으니 말이다.
치기 어린 나날을 그렇게 살았다. 바벨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버텼다. 나의 정신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비대해지고, 나의 마음은 반대로 황폐해져갔다. 육신은 너덜너덜해지고, 마음의 문은 점점 더 늘어났다. 가장 거대하고 가장 새카만 문이 생긴 날의 나는. 드디어 내가 이 비대한 망상에 잠겨 죽을 수 있음을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