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자들

# 06.

Queen  2021. 12. 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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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지금 도시의 외곽, 이 구역에 있어. 그렇지만 옆 동네로 이동하면, 내가 아는 지하 통로가 나와.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좃토마떼. 너 정체가 뭐야? 응? 지하 통로? 응?"
"아, 설명이 늦어졌네. 그건 한월이네 회사에서 지원해준 통로야. 옛날에 뚫었댔나."
"엉, 기갈나게 뚫었지."
"그쪽이 더 이상한뎁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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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는 생각을 아주, 조금 했다. 우리들이 감옥에 갇힌 시간은 5년이었다. 강산이 바뀌기엔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었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급속도로, 너무 안 좋게 변한 것 같았다. 우리들이 히어로로 활동했을 시기보다, 빌런이라거나 재해 등이 급격하게 늘어났음이 수치로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월이 구해온 정보에 의하면, 이능력을 신고하지 않은 민간인, 혹은 비능력자인줄 알았단 민간인들이 갑작스레 이능력의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점점 잦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히어로 인력은 여전히 똑같고, 그들의 억압은 우리 세대보다 더 심해졌기 때문에…. 이건 일종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히어로의 체계가 분명하게 잡혀있고, 아주 소수의 사건만이 벌어진다면 우리들이 개입하기엔 무리가 있다. 우리들은 히어로가 아닌 외부인, 그것도 수배된 상황이니. 차라리 체계가 잡히지 않은 혼란의 순간이 더 달가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씁쓸한 맛의 숨을 혀뿌리로 감싸 삼켰다. 기회라고 불러도 괜찮은 걸까. 평화의 시대였다면 좋았을 텐데. 짧지만 복잡한, 그래서 더없이 슬픈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벌써 시간은 저녁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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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력자 퇴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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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들의 상황은 하나의 기회로 극복하기엔 너무나 최악이었다. 범죄가 늘어났다. 이능력으로 인해서였다. 통제불가의 이능이 점점 발견되었다. 피해가 막중했다. 재해와 재난을 히어로를 통해 막고 있다지만, 현대 과학 기술과 학문으로 커버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비능력자들은 생각할 수 있다. 우리를 언제 해칠지 모르는 이능력자와 함께 사느니, 죽더라도 재해에 죽고, 버티더라도 그들에게 의지하진 않을 것이란 생각. 크레바스가 가져온 정보는 그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나가더니, 해당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려주며. 크레바스는, 긴 침묵 속에 짧은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위험한 건 맞으니까. 그건 크레바스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나는 영원처럼 슬펐고, 괴로웠다. 네르샤는 자신이 사 온 커피를 -치사하게 자기 것만 사 왔다.- 한 모금 쭉 빨며 그 말을 비웃었다. 미친놈들이네. 나는 네르샤를 싫어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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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우리들을 차별할 생각이 아직까진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서의 우리는 정말 '우리'를 지칭하는 게 아닌, 세상에 분포되어있는 이능력자들을 지칭한다. 정부는 그들의 시위에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고, 히어로에 대한 지원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계와 멸시를 참지 못하고, 히어로들이 하나 둘 줄고 있는 추세란다. 우리들과 전성기 시절을 공유했던 히어로 중 한 명은 자택에서 목을 맸다고 하던가. 트리거는 그 뉴스를 가만히 듣다가, 전원 버튼을 눌러 꺼버렸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람을 구하는 것에 진심이었으나, 우리처럼, 어쩌면 우리만큼이나 낭떠러지 끝으로 몰려있는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평화롭게 질식하는 기분이 들어, 나는 오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일평생 이렇게까지 답답한 상황을 겪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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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다 저런 히어로들만 있는 것 같아? 아니, 다른 방법도 있겠지. 굳이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 계획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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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잠은 쏟아진다. 처음으로 잠든 것은 한월이었고, 그다음으로는 크레바스였다. 사실, 그 둘도 졸려서 잠을 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야 하니까. 잠도 자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그들은 현명했다. 나는 미련했고. 난 방 한 구석에 틀어박혀, 여태까지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종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겹치는 부분은 하나 없고, 카테고리별로 나뉘기만 해.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조용히 있었을까.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귀를 바짝 세웠다. 트리, 나는 누군가를 구하는 것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기 싫어. 네르샤였다. 세상 모두가 우리를 죽이려 드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누굴 구해야 한다니. 그 목소리는 어딘가 거짓말을 닮아 있었다. 그냥 전부 내려놓으면 되잖아. 글라우코피스는 네르샤가 저런 말도 할 수 있음에 감탄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 그러나 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고, 말 상대였던 트리거가 (네르샤가 트리, 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그뿐이었으므로.)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까지만 말해. 그것은 듣고 있는 누군가를 의식한 투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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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구하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잖아, 네르샤."

"트리."

"그렇게 말하지 마. 못 들은 걸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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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트리거는, 겁쟁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영웅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고. 그는 보편적인 용기와, 보편적인 공포, 마지막으로 평범의 선함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문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트리거의 목소리는 의무감, 그리고 죄책감에 기인된 것 같았다. 호의라거나, 정의감이 아니라. 그가 선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정의만으로 누군가를 지키기엔. 우린 너무 오랜 시간을 방치당했다. 그들은 몇 마디를 더 나누는가 싶었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르샤는 분명 이 지하 아지트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갔을 것이다. 내일 오후가 조금 지나서 돌아오겠지. 트리거는 그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가만히 응시하다 자리에 주저앉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가, 누명을 벗는다 라는 목적이 없어도 히어로 일을 계속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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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거, 미쳤어? 왜 네 멋대로 행동한 거야? 네가 그러고도…."

"글라우…."

"네가 그러고도 히어로인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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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엔, 담요가 둘러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이 잠에 들었고, 나도 조금 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 담요를 덮어준 걸까? 고개를 천천히 들어보니, 크레바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고요했다. 평소와 똑같이 말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들었어? 응. 한월이도? …응. 조용한 질답이 끝나고, 나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크레바스, 사람을 구하고 싶어? 나는 궁금했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정말로 그들이 이 일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정의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을 터다. 그리고 구해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크레바스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누군가의 영웅이 되게 해 준다며. 나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응, 하고 싶어. 괜찮아. 그는 내 이마를 짚어주고, 그대로 바닥에 눕혀줬다. 좀 자둬. 며칠 째 깨어있었어. 생각해야 할 게 있으면 다른 애들이랑 해도 되잖아. 나는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잠이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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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라는 건 늘 한 마음일 수가 없어. 그래서 리더가 존재하는 거지. 하지만 리더가 있다고 해서 팀이 잘 굴러가는 건 아니야. 중요한 건 저마다의 속내를 얼마나 잘 아는가. 그리고 각자의 한계를 서로가 얼마나 잘 아는가. 서로를 돕고 살아야 해낼 수 있는 임무라면, 상대에 대해서 더없이 잘 알아야 해. 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서로를 가늠할 수 있게. 근데 우리는 그게 안 되잖아.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알아가는 수밖에. 이 인원을 정식으로 팀이라 칭한다거나, 진심으로 아낀다의 개념은 아니지만. 팀플레이에서 실패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 나는. …한 번이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