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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사춘기.

Queen  2021. 7. 16. 13:50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소박하고 화려한 하우스. 우리들의 과거, 추억, 유년시절. 나는 그곳에 있는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벚나무를 기억한다. 나만이 가장 소중했고, 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던 가장 최적의 시기. 나는 땅 깊숙하게 묻힌 타임캡슐을 꺼내 든다. 상자는 부드럽게 열리고,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내가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무지의 아이. 나는 그 시절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웠으나, 단 한 가지만이 부러웠다. 종이 찢기는 소음이 들리고, 가장 찬란한 '내'가 죽어갈 때쯤 보이는 건 과거에 대한 그리움. 잔상. 미련. 나는 24명이 찍혀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본다. 시트린과 하오란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만이 나의 미련이오, 나의 과거요, 잔상이자 그리움일 터니. 나는 그 사진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바닐라는 어찌하여 이런 무저갱 속에 갇힌 것일까.

 

나는 나의 결함을 알고 있었다. 조금 이른 사춘기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성장통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마음의 결함을 고치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를 끝없이 모방하여 이 마음의 틈을 채우고 싶었으나, 모방의 대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건 과거의 내가 맞이할 수 있는 가장 큰 비참함이었다. 세상에. 문제가 있는 걸 알면서, 문제를 고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 답을 찾지 못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가장 어렸던 시절, 가장 가혹한 문제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던 나는 몸을 비틀고 괴로워했지. 엉뚱한 방향으로 늘 감정을 표출해냈고, 엉뚱한 방향으로 늘 타인을 괴롭혀왔지.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아.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너희들이 키워낸 '어린아이' 바닐라로. 너희들의 다정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게 자라 버렸어. 아르카디아에서의 나날은 사춘기였지. 성장통이었고. 하지만 에덴에서의 나날마저 성장통일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나는 영원히 어렸나 봐. 바닐라, 라는 이름 세 글자를 망가트렸고. 에버 글로우의 나날을 먹으로 칠해버렸지. 나는 나에게 남은 게 없음을 알아. 가족, 친구, 번듯한 집이나 꿈. 희망 따위가 하나도 없음을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그게, 내 최선이었다면, 너희는 믿어줄까? 너희는, 그런 나를 사랑해줄까. 나는 매일 무서웠어. 자라나는 하루하루에 잠겨 죽을 정도로.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억울한 것만 자꾸 쌓여가. 나는 나를 잃어버리는 기분에 쉬이 눈을 뜰 수 조차 없었어. 세상을 보는 게 무서웠고. 내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미련이, 나를 떠나가는 게 싫어.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세상에 나를 버려둘 리 없으니까! 날 사랑해줘, 날 믿어줘, 내 이름을 불러줘! 비참한 절규가 이어지고, 나는 무저갱 속에서 손을 뻗는다. 단 한 번의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말의 대답은, 어떤 형태의 것인가? 나는 이제 답을 알았다.

 

나는 아직 에덴에 남아야 해. 내가 저지른 모든 죄를 받아들여야 하니까. 비록 올바른 형태는 아닐 거야. 검은색 가발을 쓰고, 빨간색 렌즈를 끼고. 코는 조금 높인 채, 턱은 조금 깎은 채. 여전히 거짓말쟁이, 여전한 사기꾼. 나는 내가 어떤 길을 딛고 있는지 안다. 글러먹었다고,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길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이할 것이다. 거대한 기계장치의 무대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를 것이고,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꿈, 희망, 사랑 따위의 모호한 형체의 것들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겠지. 그 끝에는 검정 장미를 끌어안자. 푸른빛 태양 아래에서 사랑을 노래하자. 나는 행복의 나날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보지 못했던 것을 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숨기게 되겠지만,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하게 될 것이고.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집을 설계할 수 있겠지. 고작 그 정도의 가치뿐인 생명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불필요하다 칭해지는 자비를 내리게 될 것이다. 옛날의 가르침을 잊고 싶지 않아 성장할 것이고, 서로의 차이점을 좁혀가겠지.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도 있을 테고, 그리하여 외면당하던 진실을 추리해낼 수도 있을 터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필요를 논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불의를 참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 것이다. 가장 완벽한 조각상은 형체를 잃고, 우리들은 형편없는 몰골로 도망치겠지만. 인생이라는 승부 앞에서 도망치진 않겠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저울을 무너트리면 분명 이 세상을 포기하게 되겠지만. 그만큼 무섭겠지만. 지대한 사랑으로 한 번은 극복해낼 수 있을 터다. 그렇게 작별, 그렇게 안녕. 과거와의 끈을 자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드넓은 바다로 뛰어들겠지.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장해버릴 테고, 언젠가 한 그릇의 다정을 마실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이 찬란한 세상에게 외치자, 허황된 이상론을. 어딜 가도 떳떳할 수 있게, 행복할 수 있게.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크림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꼬마가 서 있었다. 나는 그 시절의 내가 무척이나 못났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몇 년 뒤에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끔찍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미련은 결국 이런 형태였다. 다정도, 신뢰도, 그 시절에는 보잘 것 없었으나 훗날에 돌아보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감정인 것을. 그리하여 살아감이 후회되지 않음을. 나는 굳게 믿었다. 그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잡고 달렸던 감촉이 선명하다. 허황되다며 웃어버린 나날을 기억한다. 나는 이제 내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알았다. 그리하여 작별을 고한다. 안녕, 안녕히!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좋은 저녁을 보내길 바라!

 

 

그리하여, 사랑하는 바닐라.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그동안 나를 괴롭혀온 지긋지긋한 사춘기는 끝났어. 눈을 떠. 이젠 성장통이 아닌 세상을 맞이할 때야. 우리는 잘 해내지 못할 거야. 글러먹음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겠니. 하지만 도전해야지. 이제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하잖아. 창조의 어머니는 모방. 우리는 너무 긴 시간을 모방해왔어. 그러니까, 바닐라. 이제부터 해보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 이 미련이 전부 사라져도 어쩔 수 없다며 웃을 정도로. 찬란한 마음을. 

 

 

 


 

속보입니다.

7월 17일. 에덴의 제1 급 지명수배자이자 '바닐라'로 알려졌던 범죄자 '크림휠'이 자수를 하여 에덴 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는데요. 그의 고발에 의거하여 누명과 진실을 상세히 조사하겠단 경찰의 포부가 밝혀져, 시민들은 이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