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건 카드 패와 같다. 전부를 드러낼 수도 있고, 전부를 감출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내뱉느냐에 따라 반응이 갈라지고, 결과가 달라진다. 그 단순한 것을, 이해 못 할 시빌라가 아니었다. 다만, 시빌라가 어려운 것은 -그것을 어떻게 내뱉느냐, 라는 것이었다. 사람과 말을 나눠본 적이 있다면 너무도 쉽게 알 텐데. 아쉽게도, 시빌라는 너무 오랜 시간 고립되어 있었다. 제 아무리 축복받은 재능, 선천적인 천재성을 부여받았다 한들. 해본 적 없는 것을 해낸다는 건,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묻는다. 나는 이것을 선택했는가? 어쩌면 나의 선택지는 이것 하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대의 양해를 구하기엔, 너무 긴 침묵을 건넜지만.
날개를 꺾어버린 천재의 말로를 그대가 아는가. 나는 알고 있다. 자존심을 전부 버리고, 비틀거리고, 악을 쓰다 진흙탕에 굴러 객사해버린 천재를 아주 잘 알았다. 무례한 자는 누구인지, 참을 인을 새겨 삼킨 자가 누구인지. 진흙탕 안에 쳐박히면, 이미 보이는 것은 더러운 오물들의 것인지라. 그런 감정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멋대로 짚어나가며 시빌라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단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 없으니, 잘못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꾸며낸 잘못과 미안함으로 타인을 대해도 모자랄 진데, 자신의 과오조차 모르니 그것을 사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빌라의 호흡은 단조로워서, 어깨가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이 길어질 뿐이었다. 내가 말하면, 당신이 이해해줄까. 시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내리 깐 눈으로 노트를 바라본다. 아니,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기록의 의미도, 내 과오도, 해야 하는 일도.
시빌라는 그에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노트를 집어든다.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 이것은 분노인가, 원망인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사실, 알고자 하면 알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이것을 기억할 수가 없어서…. 시빌라는 노트를 가볍게 털었다. 둔탁한 소음이 몇 번 반복되고, 시빌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이 노트 속에 기록될 것이다. 사티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세세하게 뜯어 기록될 것이다. 관찰될 것이매, 영원으로 남을 것이다. 시빌라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행동들을 잊어버렸다. 왜 내가 사티야 씨와 언쟁을 하고 있었을까? 이 노트가 왜 바닥으로 떨어졌을까. 함몰되는 호수 속에 기억 하나 두 개를 버리다 보니, 어쩐지 마음이 홀 가뿐 해진다. 아, 당신은. 관찰당하는 게 싫은 편인가 보다. 다음에는 들키지 말자. 대놓고 묻지도 말자. 조용히, 평소처럼. 뜻 모를 말들이 뜨문뜨문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자신만의 합리화를 거쳐 완성된다. 시빌라는 그때쯤 되어야 입을 연다. 네. 대답이 간단했다.
사티야의 으름장은 무시할 게 되지 못했다. 어느 날, 내 기숙사 방이 초토화가 된다면. 내가 무언가의 실수로 -티를 낸다, 따위의. - 사티야가 화를 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시빌라는 생각한다. 그래서 웃었다.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이 미숙하고 너그러운 고양이야. 나는 짓밟히고, 찢겨 나간 자신의 모든 글들을 떠올리고 만다. 그에 비해 당신은 말을 먼저 해주니. 그것만으로 다정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리하여 시빌라가 입을 연다. 사티야 씨가 무른 사람이라서 안심 했어요. 그 말이 새어 나온 것은, 그냥 웃겨서. 웃음이 나와서. 목숨보다 소중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정말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귀하게 여긴 것은. 이런 노트가 아니라, 이 노트에 적힌 것들일 뿐인데….
언젠가 사티야 씨가 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기쁘겠네요. 제 도움이 필요한 날이 와서요.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빌라의 미소는 그려낸 것처럼 가벼웠다. 사과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 여태까지 모든 행동이 싸움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 혹은, 이유 없는 굴복이었다는 듯. 자존심이라곤 한 톨 깃들지 않은 모든 행동이 끝나자. 그저 평소로 돌아올 뿐이었다. 속이 상한 것 같지도,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내일을 두려워한 적 없으니, 피부로 와닿는 으르렁거림이 간지러울 뿐이었다. 단조로운 태도로 노트의 겉면을 쓸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빌라가 속삭인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저도 딱히 누군가를 이해한 적 없어요.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짝이 풀로 붙인 편지. (0) | 2022.02.13 |
---|---|
꽃무늬 편지지 (0) | 2022.02.13 |
네네. (0) | 2022.02.10 |
봉사 시작 5시간 이후…. (0) | 2022.02.09 |
비수. (0) | 2022.01.13 |